미니애폴리스 교외에 사는 트레이시 펙이라는 70 즈음의 여성은 젊은 시절 테니스를 좋아했다. 프랑스 오픈을 보러가는 게 꿈이었다. 40대 후반이던 1999년 마침내 그는 친구들과 프랑스에 가서 소원을 풀었다. 그리고는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자리에 앉은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언니인 반자는 17살, 동생인 아이다는 12살이 채 안되었다. 모국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으로 포격과 화염에 휩싸여 가족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가고, 그곳 부다페스트에서 어찌어찌 비자를 얻어 미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난민으로 미국에 입국하면 모든 게 낯선 환경에서 소녀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불확실성 앞에 내던져진 그들을 트레이시는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자매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나중에 열어보라고 했다. 그것이 23년 전 5월 31일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트레이시와 그때 그 자매는 지난 12일 뉴욕에서 눈물의 상봉을 했다. 이산가족 다시 만난 듯 세 사람은 얼싸안고 기뻐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비행기 안의 여린 소녀들은 멋진 어른들로 성장했다. 마취의인 언니는 결혼해 딸 둘을 두었고, 정치학을 전공한 동생은 여러 비영리단체 활동을 거쳐 컨설팅 회사를 공동 설립했다.
그날 비행기에서 내려 소녀들이 열어본 봉투 안에는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소녀들에게, 폭격으로 가족에게 문제가 생겨서 참 안 됐다. … 미국에 온 걸 환영한다. 이걸 유용한 데 쓰도록 해라. 비행기에서 만난 친구 - 트레이시.” 그리고 현금 100달러가 들어있었다.
그 돈 100달러로 자매는 그해 여름 3개월을 살았다. 그들의 전 재산이었다. 돈을 들고 수퍼마켓에 가도 모든 게 너무 낯설었다. 팬케익과 코카콜라만 눈에 익어서 그걸로 매 끼니를 때웠다. 이어 호스트 가정으로 보내지고, 1년 후 부모가 오면서 이들의 생활은 안정을 찾아갔다.
이민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수없이 이사를 했다. 그 힘든 과정, 그 긴 세월 속에서도 아이다가 보물처럼 간직한 것은 그때 그 봉투였다. 전쟁으로 나쁜 일만 수없이 겪다가 갑자기 마주한 낯선 이의 친절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 싶어지면서 삶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친절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체험한 자매는 자신들도 어려운 이웃돕기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
한파로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건 따끈한 차 한 잔. 혹은 뜨끈한 국물. 세파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건 따뜻한 마음.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절망을 녹이고 사람을 살린다. 조건 없이 내어주고 보듬어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베푸는 아름다움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은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음.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갚는 지은보은(知恩報恩)의 마음이다.
자매가 트레이시를 찾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였다. 비행기에서 만난 고마운 아주머니를 반드시 찾아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없었다. 성도 모르고 아는 건 트레이시라는 이름 그리고 테니스를 좋아한다는 것뿐. SNS로 수소문 해보고 항공사에 문의해보고 2018년에는 미네소타의 지역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지난봄 CNN이 이들의 사연을 보도하고부터. 제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손 편지 사진을 보고 트레이시의 필체라는 걸 단박에 알아본 사람도 여럿이었다. 지난 4월 말 트레이시와 자매는 줌을 통해 상봉했다. 그리고 CNN이 ‘CNN 영웅들’ 프로그램에 이들을 특별손님으로 초대하면서 성탄의 절기에 세 사람은 한 자리에 모였다. 자매가 자신을 그토록 찾았다는 사실, 20여년 전 봉투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트레이시는 가슴이 먹먹했다. ‘작은 친절이 만드는 엄청난 힘’을 자매는 너무도 아름답게 상기시켜주었다며 감격해했다.
“당신을 늘 생각했다.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당신은 늘 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동생은 말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있다”고 언니는 단언했다.
지친 누군가를 일으키고,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겉옷을 달라 할 때 속옷 정도 더 주고, 5리를 가자 할 때 5리 정도 더 가주면 될 일이다. 그렇게 살라고, 그렇게 사는 삶이 옳다고 본을 보이신 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고단한 인생 살아내느라 거칠어진 마음을 내려놓고 내면을 들여다보자. 거기 깊은 우물처럼 인간본연의 아름다움이 고여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 주린 이를 보면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를 보면 옷을 주게 되는 선하고 맑은 마음이다. 너무 오래 퍼 올리지 않아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 뿐이다. 조건 없이 베풀고 사랑하면 어떤 기쁨이 찾아드는지, 그 비밀을 아는 자들이 예수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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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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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3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공유 감사드립니다!
트때문에 항상 어수선한 지난 5년 그리고 요즘도 매일 하지만 여기저기서 만날수있는 착한 사람들 이들때문에 나라가 지탱하고 그래도 살맞나는 오늘 그리고 내일도 그리되리라 믿고사는 우리들..한번 믿고 그리고 나도 너도 트 같은이는되지말고 서로서로돕고 믿고 오고가며 잘 지내는 우리모두가 되기를바랍니다.
매번 권 위원님의 글로 감동 받는데 이번 칼럼은 감사와 기쁨을 길어올릴수 있는 “마음속 깊은 우물”의 비밀까지 알려 주네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