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4일, 나는 아침 일찍부터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로 헐레벌떡 동네의 한 커뮤니티 센터로 향했다. 그 날은 텍사스에서 미국의 중간선거 조기 투표가 시작됐던 날로, 내가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 미국에서 미국 선거를 위해 처음으로 해보는 투표이기도 했다. 15년이 넘도록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일을 하며 열심히 세금을 내었지만 내가 누군가를 권력의 자리에 선출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와 힘을 직접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처음 할 때 느끼는 설렘과 뿌듯함과 더불어 지난 15년간 미국에서의 생활이 이 투표권 하나로 더 특별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투표를 하고 받는 조그만 “I voted(투표했어요)” 스티커를 닳도록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내 랩탑에 붙였다. 다음 날 수업시간에서는 학생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며 “나 어제 처음으로 투표했어!”라며 자랑 아닌 자랑도 했더랬다. 겸연쩍어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깨달았다. “아 이 단어를 내가 이 상황에서 처음 써보는구나.”
영어로 했던 많은 처음을 생각한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던 날, 환승하는 비행기를 놓쳐 다시 비행기 스케쥴을 맞춰달라고 요구했을 때 느꼈던 묘한 뿌듯함을, 영어로 처음 친구를 사귀고 알듯 말 듯 한 그들의 의중을 읽어낼 때 실례를 하지는 않을까 하며 느꼈던 조마조마함, 또 친해지고 난 뒤 역시 사람들 다 비슷하구나 하고 생각하며 들었던 안도감을,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티칭을 시작했을 때의 불안함속에 느꼈던 소속감을, 첫 잡 마켓에 나와 직장을 구할 때 느꼈던 패배감과 희열을 기억한다. 고객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어 말보다 앞선 감정으로 불만을 호다닥 쏟아내고 난 후 느꼈던 속 시원함도, 처음 연애를 시작하고 한국어로는 절대 쓰지 않을 법한 표현들을 담담하게 쓰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들었던 묘한 감정들 또한 나의 몸에 고스란히 차곡차곡 새겨져있다. 한국어로도 해보지 않았던 모든 일들을 영어로 처음 할 때마다 다시 어린 아이처럼 작은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면서도 그만큼의 경험으로 나의 세계가 조금씩 넓고 깊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경험치 만큼 나의 언어도 나와 함께 성장해 있었다. 누군가가 한 말을 못 알아들어 속상하기도, 바보같은 기분이 들어 웃으며 알아들은 체만 했던 시기가 지나고, 영어를 못 알아듣는 때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럴 수도 있지 뭐’라며 방금 한 말이 무엇이냐고, 못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정확히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부당한 대우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쩔쩔매고 이럴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적어놓은 일기 덕분에, 이제는 당황스러움으로만 그 상황을 넘기지 않고 나름 노련하게 나의 의견을 피력하고 남은 몫은 상대방의 것으로 남겨둔 채 그 상황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수업시간, 나의 질문에 언뜻 보기에 전혀 상관없는 답을 내놓는 나의 학생들에게 갸우뚱하지만 않고, 어떻게든 연결지어, ‘아 혹시 이런 관점을 얘기하고 싶은 거였어요?’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나보다 학교 구조상 낮은 지위에 있는 동료를 위해 그들을 치켜세우는 발언들을 요령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넌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의 숨은 의도를 읽어내고, 일부러 애매모호한 대답을 돌려주며 속으로 통쾌해 하는 경험도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듯 나의 언어는 내가 나로 살 수 있기 위한 수단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하고 싶은 언어는 항상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와 같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질문과 맞닿아있다. 그래서 나의 여러 정체성이 공존하기 어려울 때, 여러 언어를 가로질러 가는 법을 배운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거나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학생들, 또는 혼자 자녀를 양육해야하는 한부모 가정의 여자 학생들이 과제 제출일을 연장해달라는 부탁을 해올 때면 나는 여자로서 장녀로서 체화한 언어로 가로질러 이야기하게 된다. 영어가 아직 완전히 편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나 역시 그런 감정을 항상 느끼고 있는 영어 사용자로서 다가가게 된다. 이러한 언어들이 가끔은 학교와 고등기관에서 주로 요구하는 기준이나 관행들과 엇갈리는 경우가 많기에, 나는 아직도 흔들리고, 불편하고, 당황스럽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내가 된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언어는 곧 나의 경험과 내가 느낀 감정, 나를 훑고 지나가는 모든 것의 총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훗날, 내 안에는 무슨 말들이 남아있을까? 어떤 기억, 감정, 경험, 그리고 말들이 나를 지탱해줄까? 그 언어들이 내가 만나는 매일의 세계를 더 다정하게, 더 유연하게 이해하고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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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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