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주일이 다 되가는데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추모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8일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후 세계 미디어는 아직껏 그의 96년 생애, 70년 재위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치하하고 있다.
영국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져있고, 나라 전체가 말 그대로 국상 중이다. 향년 96세면 당연히 곧 타계를 예상하고 준비돼있었을 텐데도 이처럼 모두 놀라고 슬퍼하는 반응은 좀 의외다. 그만큼 많은 존경을 받았고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2차 대전부터 브렉시트까지 영국이 격동의 시기를 헤쳐오는 동안 여왕은 영국의 지주였고 닻이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국민의 통합과 단결을 이끌어내는 중심추 역할을 했고, 영국뿐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현재 영국처럼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스페인 덴마크 일본 태국 등 20여 개국에 이르지만 어떤 나라의 왕이나 여왕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점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세계의 여왕’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재위 70년 216일 동안 여왕은 100여만 마일을 여행하여 117개국을 찾았고, 역대 어느 교황보다 많은 국가 정상들을 만났다. 윈스턴 처칠부터 리즈 트러스까지 15명의 영국 총리의 예방을 받았고, 해리 트루먼부터 조 바이든까지 미국 대통령 13명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여왕의 가장 큰 힘은 평생 변하지 않은 성실함이었다. 그녀는 성인이 된 21세 생일날 라디오 중계 연설에서 “나의 전 생애를 국가와 영연방 가족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며 마지막 순간까지 극기심을 갖고 공적 의무를 수행했다. 여왕이 최후로 수행한 임무는 별세 바로 이틀 전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사임을 수락하고 리즈 트러스를 맞아 15번째 총리로 임명한 일이다.
1926년 태어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는 출생 당시 왕위승계 서열 3위였다. 그러나 10세 때 백부인 에드워드 8세가 그 유명한 심슨부인과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스스로 퇴위하자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차기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25세 때인 1952년 조지 6세의 갑작스런 서거로 여왕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거행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TV를 통해 전 세계로 중계되었는데 당시 영상과 사진들을 보면 그 아름답고 위엄있는 모습에 새삼 놀라게 된다.
여왕은 13세 공주시절, 아버지를 따라 다트머스 왕립해군학교를 방문했을 때 만난 훤칠한 18세의 사관후보생 필립 마운트배튼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8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애정을 키우다 1947년 결혼했다. 여왕과 필립공은 3남(찰스, 앤드루, 에드워드 왕자) 1녀(앤 공주)를 두고 73년 해로하며 국민의 존경을 받았지만, 자녀들과 손주의 말썽으로 왕실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과 이혼, 비극적인 죽음은 세계가 떠들썩한 이슈였고, 특히 1992년은 여왕이 고백한 대로 ‘끔찍한 해’(annus horribilis)였다. 그해 다이애나가 찰스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의 관계를 폭로하면서 영국이 발칵 뒤집어졌고, 앤드루 왕자의 아내 사라 퍼거슨의 불륜 사실이 알려져 두 사람이 별거를 시작했으며, 앤 공주 역시 남편 마크 필립스의 불륜으로 이혼에 이르렀다. 한 해 동안 3명의 자녀가 가정파탄을 맞은 것이다. 참고로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58)만이 1999년 결혼한 소피 리스존스와 두 자녀를 두고 지금까지 구설수 없이 무난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왕실의 스캔들은 계속 이어졌다. 2019년 앤드루 왕자의 미성년자 성폭행 스캔들이 터져 나왔고 결국 올해 초 모든 공직업무에서 사퇴하고 왕실 지원금과 ‘전하’ 칭호를 박탈당했다. 한편 어머니 다이애나의 죽음 후 사고뭉치가 되어 수많은 염문설을 뿌렸던 손자 해리 왕자는 2018년 이혼녀이며 흑인혼혈인 미국배우 메건 마클과 결혼했는데 2020년초 인종차별을 당했다며 왕실을 떠남으로써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처럼 메가톤급 가십이 터질 때마다 뉴스는 전 세계로 타전돼 수십억 인구의 입방아에 올랐고, 영국 내에서는 세금만 축내는 왕족들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실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실추됐어도 그 한가운데 바위처럼 버티고 선 여왕만은 절대적인 신뢰를 유지했다.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위엄을 지키는 엘리자베스 2세의 지혜로운 처신 덕분에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제 엘리자베스 2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이제 찰스 3세의 시대가 시작됐다. 어머니와 다이애나의 그림자에 가렸다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남들 은퇴할 나이(73)에 국왕 자리에 오른 그가 과연 어떤 군주가 될지, 세상이 지켜보고 있다. 영국 언론매체들은 평생 정치적 의견을 내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2세와는 달리, 젊어서부터 환경과 기후변화, 유전자변형,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견해를 표명해온 찰스 3세는 정치적 의견도 적극 개진하는 군주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왕(여왕)은 매주 화요일 총리를 접견하고 나랏일을 논의하는데, 이 자리가 군주의 의견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그런 한편 이 참에 군주제는 폐기돼야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아직도 영국 국왕이 국가원수인 15개 나라들은 이 기회에 제국주의 유산과 작별을 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식이다. 여왕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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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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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영국이나 일본등을 군주제도가 참으로 시대 착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뀐다.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사람들이 의지할수 있는 그런 왕이 있다면 좋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의 정치인들은 직업인이다. 가지 임기동안에 할일을 하고 떠난다. 국가관도 약하고 국민들은 그냥 투표하는 사람으로만 본다. 왕은 국민을 돌보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사익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자리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