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다. 어느 시인은 아버지 등을 기억하고, 어떤 이는 안경을, 어떤 이는 밥그릇을 기억하기도 한다. 내게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의 무릎으로 남아 있다. 책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내가 집에서 지루해하거나 기분이 안 좋아 있으면 나를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오빠 둘에 막내였던 나는 오빠들 사이에 끼지 못해 심통이 난 후 아빠 무릎에 종종 앉곤 했었다. 마당 가운데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면 별나라로 들어가는 듯했다. 햇살 좋은 봄날,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에서 이야기를 듣던 그 향기로운 기억…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후, 내겐 또 한 분의 아버지가 생겼다. 시아버님은 항상 온화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었다. 자식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소소한 대화를 어린 손주들과도 잘 나누셨다. 시아버님을 기억하니 그 따스한 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느 해인가 동남아로 출장을 갔다가 한국에 하룻밤 들렀을 때였다. 아버님은 내게 한국에 하룻밤밖에 머무르지 못하니 친정집에 가서 부모님과 보내라고 말씀하셨고, 바쁜 나를 고려해 시댁 식구들과는 다음 날 점심 식사만 하기로 일정을 잡아 놓은 터였다. 내가 도착한 날, 아버님은 공항에 나오셔서 나를 잠시 보시고는 내 손에 봉투를 지어주셨다. 한국에 왔는데 한국 돈이 없을 테니 그 돈으로 택시도 타고 가고 부모님과 맛있는 것도 사 먹으라며 건네주시던 그 따스한 손.
결혼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왔고 아이들을 돌봐주러 부모님이 오가시곤 하셨지만, 직장 일과 육아에 지친 나는 부모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시간을 갖지 못했다. 2018년 가을, 뇌경색으로 아빠가 병원에 실려 간 후 말을 잃으시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후에야 나는 왜 그리 바쁘게만 살았을까 오열했다. 친정아버지 소식에 급히 한국에 가 며칠 머무른 후, 떠나오기 전날 친정아버지는 재활병원으로 옮기시고, 나는 시댁으로 갔다. 남편은 마지막 날 저녁 친구들과 시간을 갖기위해 나가고, 시부모님과 나만 남게 되었다. 허리가 불편하셔서 움직이길 싫어하시는 아버님을 고려해 내가 나가서 셋이 먹을 저녁을 사 오겠다고 하자, 어쩐 일인지 시어머님은 나와 둘이 나가 냉면을 사 먹고 오는 길에 아버님 저녁으로 만두를 사 오겠다고 하시고는 문을 나섰다.
나는 황급히 따라나섰다. 낮에 병원에 계신 친정아버지를 방문했다가 방문객들과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고 말하지 못한 채 어머님이 앞서가시는 대로 함께 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코다리냉면 두 그릇을 주문하신 어머님은 음식이 나오자 바삐 드셨다. 점심을 제대로 드시지 않아 시장하셨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도 덩달아 급히 먹고 포장된 왕만두를 사 들고 음식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네 시아버지가 자기 관리를 잘하시는 건 좋은데 어떨 때는 너무 철저해서 답답할 지경이다. 밤 열 시 반이면 꼭 주무셔야 하고 아침 식사는 꼭 일곱 시 반, 점심은 열두 시, 저녁은 여섯 시. 어쩌다 모임에 나갔다가 차가 막혀 저녁 여섯 시가 좀 넘으면 기다리지 않고 아무거나 대충 꺼내서 드신다.”
시간을 확인하니 여섯 시 오분. 발걸음을 재촉해서 돌아왔는데도 집에 도착하니 여섯 시 십오분. “아버님, 식사하세요” 하니, 아버님께선 “시장해서 대충 꺼내 먹었다”고 하셨다. 음식도 정해진 양 외에는 절대 더 많이 드시지 않는데, 먼 곳에서 온 맏며느리가 들고 온 정성을 생각하셨는지 그래도 그날은 만두를 조금 드셨다. 만두를 천천히 드시는 아버님을 보며 병원에 누워 계신 친정아버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코에서 위까지 연결된 줄을 통해 식사하고 오줌줄을 통해 소변을 빼내고 기저귀에 대변을 보며 꼼짝없이 누워 계신 아빠. 산해진미를 찾아 먹기를 즐기고 식사도 꼭 밥 두 공기씩은 드셨었는데…
2019년 봄, 친정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고 아빠의 유물로 아빠가 읽으시던 책 몇 권을 가져왔다. 말을 잃은 아빠와 나누지 못한 대화를 아빠가 밑줄을 치며 읽은 책을 통해서나마 할 수 있길 바라며, 한국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리영희 선생과 임헌영 교수와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 속의 대화를 통해 아빠의 삶을 더듬어보았다. 아빠에게서 듣던 4.19 혁명, 아빠 친구도 잡혀갔다던 인혁당 사건…. 시대의 아픔을 그리고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술에 기대어 살아내신 아빠의 삶. 김지하 시인이 노래한 ‘오적’의 시대에 오적이 될 수도, 그렇다고 오적에 대적해 투쟁할 수도 없었던 삶.
2020년 늦가을엔 시아버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삼 개월여 만에,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코비드가 온 세상에 극성이던 때여서 시아버님은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도 우리에겐 한국에 나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잘 이겨내고 있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도 온전하실 때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한국에 나갔던 남편은 열흘 만에 아버님의 임종을 맞았다. 2주 격리도 마치기 전이라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임종을 앞두고 아버님 병실에 들어가 화상전화를 해서 나와 아이들은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올가을엔 한국에 가서 두 분의 산소를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겠다.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살아있다고 했던가. 두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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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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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