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 탁자 위에는 지난 마더스데이에 큰 아이가 안고 들어 온 안개꽃 한다발이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겨 하얗게 빛난다. 그리고 나는 그 앞을 지날칠 때 마다 25살의 여린 신부와 31살의 젊은 나를 만났다. 그렇게 5월은 왔다.
초저녁부터 빗방울이 소란스럽게 지붕을 두드리더니 밤 사이 숲이 더욱 깊어졌다. 깊은 산은 마을로 이어졌고, 성큼 성큼 우리집 마당까지 내려와 온 집을 포위했다. 내일쯤에는 뒷 뜰에 내려가 보아야지 하는 마음은 비가 와서 미루고, 바빠서 잊고, 다시 비가 내려 그 마음을 접곤 했었다. 그렇게 열흘을, 다시 일주일을 머뭇거리며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계절을 보내고 맞았다. 오늘은 다시 비가 내리니 유리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위로를 받아야 했다. 화사하게 피었던 벗꽃이 흔적도 없이 사려져 버렸음을 뒤늦게 알아차리며 허전해 했고, 한 뼘도 더 자란 장미가 가지 끝마다 빨갛게 봉우리를 내밀며 꽃이 되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환호했다.
욕망과 현실 사이에 유리창 하나가 가로막혀 있었고 나는 오늘도 그 창가에 서서 마음만 창문을 넘나 들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열린 창으로 봄의 향기가 스며들었고, 비에 젖은 시간은 오래된 5월의 어느날을 소환했다. 순수, 사랑, 진리, 영원. 정의, 진실 같이 모든 언어들이 원석으로만 존재했던, 가공되거나 세공된 것들은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극단적 이념에 사로 잡혀 있던 오만의 시절이었다. 그 오만과 독선의 시간도 5월이 되면 마치 꽃을 든 신부가 내게로 걸어오듯 순수하게 느껴진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 갈 수 없을거라는 생각 어디쯤에서 서성이다 문득 창을 사이에 두고 가는 봄을 가만히 바라 보았던 사람도 나 였음을 깨닫는다. 평생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머뭇거렸음을 고백한다.
나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향탓인지 계절도 어느 한 계절 보다는 계절과 계절 사이의 간절기를 좋아한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좋고, 남들이 놓쳐버린 탓에 온전히 내 것 이어서 좋다. 오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계절이어서 나만의 계절이 된다고 느꼈던것 같다. 비록 무명의 계절이지만 오롯이 마음을 주면 도드라져 보이는 계절이기도 했다. 긴 겨울을 지내며 오지 않을 것 같은 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뜨거운 햇살 아래 번지는 땀을 닦아내며, 가을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 귀기울이는 시간에도, 무언가를 아쉬워하며 경계에 서서 기다리는 시간은 어느 누구도 보지 않는 까닭에 버려진 유기견에 눈길이 가듯 마음이 쓰였다. 나 역시도 그 ’사이‘처럼 살고 싶고 그렇게 잊혀져 가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오늘도 창을 사이에 두고 서 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없는 것, 보내는 것과 보내지 못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과 가질수 없는 것. 내려놓는 것과 내려 놓지 못하는 것 그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별일 없는 한 남은 생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때로는 하늘을 보고 새와 바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림 또한 여전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살고 싶은 세상 사이에서 하루가 가고 어제 기다리던 하루를 맞이한다. 기다리는 편지와 오지않는 편지 사이에서 어제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책상 서랍에는 지난해에 써 두었던 묵은 편지가 있다. 다시 5월이 왔는데도 나는 아직 보내지 못하고 있다. 꽃이 졌고 다시 꽃이 피었다.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았고 보낼 편지는 아직 책상 서랍에 있다. 그렇게 5월이 가고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강이 흐른다. 산과 강의 경계를 구분짓지 않으면서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서 숨 한번 크게 고르며 하루를 기쁘게 닫는다.
글을 쓸 때마다 늘 부끄러웠다. 부족한 글이나마 지면을 할애해 주신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부족했으나 깊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주신 독자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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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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