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이 지났다. 양력 설날 본지에‘나이’에 관한 기사가 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를 세 가지 방식으로 센다. 세는 나이, 연 나이, 만 나이다. 이렇다 보니 여러 혼란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태어난 해부터 한 살로 치는 나이를‘세는 나이’라 한다. 필자에게는 1월생 오빠도 있고 12월생 동생도 있다. 두 사람 모두 세는 나이를 댈 때마다 억울해한다. 한 사람은 나이가 꽉 찼고 또 한 사람은 애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연 나이’는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뺀 나이다. 병역법이나 청소년보호법에서는 같은 연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연 나이를 적용한다. 이 역시 불합리한 면이 있다. 2022년을 기준으로 2003년생은 1월 1일생이든 12월 31일생이든 와인을 살 수 있다. 그런데 2004년 1월 1일생은 하루 차이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만 나이’는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태어난 이듬해 생일에 한 살이 된다. 그래서 만 나이가 공평하니 나이 기준을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사람이 절대다수라고 한다. 민법 등 법률에서는 만 나이를 적용한다.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도 통용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여기에 양력·음력을 따지기도 하고 소위 ‘빠른 ○○년생’도 있으니, 친구 A가 친구 B의 선배가 되기도 한다. 이래저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와인 나이가 포도 수확한 해 기준인 이유
와인에도 나이가 있다. 와인도 사람처럼 생년(生年)을 기준으로 나이를 센다. 와인의 생년을 빈티지(vintage)라 한다.
프랑스에서는 밀레짐(millsime)이라고 부른다. ‘vintage’는 수확을 뜻하는 프랑스어 ‘vendange(방당주)’의 고어인 ‘vendage(방다주)’에서 비롯했다. 이는 라틴어 ‘vnum(와인)’과 ‘dmo(거두다)’의 합성어 ‘빈데미아(vindma)’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와인의 나이를 매기는 기준이 왜 포도를 수확한 해일까? ‘와인이 완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와인은 포도를 수확해 발효와 숙성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보졸레 누보와 같은 햇와인은 두어 달 만에 뚝딱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와인은 발효와 숙성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물론 발효와 숙성 기간은 와인 스타일과 품질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급 와인은 보통 2년에서 3년, 5년에서 10년 뒤에 출시되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와인이 완성된 시점을 빈티지로 표기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둘째, 이 이유가 사실 더 큰데, 와인의 원료인 포도가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라 수확되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포도 품질은 와인 품질을 좌우한다. 모든 농사가 마찬가지이지만, 포도 작황도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싹이 트고 꽃이 피는 봄에 서리가 내리면 냉해를 입는다.
한창 여물 시기에 일조량이 부족하면 포도가 잘 익지 않는다. 여기에 우박이라도 떨어지면 수확량이 급감한다. 수확기에 비가 많이 내리면 포도에 수분이 많아져 맛과 향이 밍밍해진다. 이러한 포도로 와인을 빚으면 와인 맛도 밍밍할 수밖에 없다.
장마철 수확한 수박처럼 말이다. 기후가 좋아야 포도의 당도, 산도, 타닌의 성숙도가 높아져 와인도 맛있어지니 당연히 원재료인 포도를 수확한 해를 빈티지로 삼는 것이다.
■빈티지 차트의 A to Z
이렇듯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빈티지가 좋은 해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해도 있다. 여러 기관, 전문가, 미디어에서 포도 작황을 확인하고 테이스팅하여 연도별, 지역별, 품종별로 빈티지 차트(vintage chart)를 만들어 공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주로 100점, 10점, 5점 만점으로 수치화해 표기하고, 병모양이나 색깔로 구분해 와인 마시기 적당한 시기를 알려준다. 대표적으로 와인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와인인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 베리 브러더스 앤 러드(Berry BROs. & Rudd), 로버트 파커가 발행하는 와인 애드버킷(Wine Advocate) 등이 차트를 만든다.
와인 전문가나 애호가들은 품종뿐만 아니라 빈티지별 지역별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테이스팅을 하기도 한다. 빈티지별로 하는 것을 버티컬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이라 하고, 같은 빈티지 와인을 지역별로 하는 것을 호라이즌틀 테이스팅(Horizontal Tasting)이라 한다.
빈티지 차트의 점수가 높다는 것은 그해 농사가 잘되어 좋은 포도로 와인을 빚었으니, 와인의 구조감이 좋아 숙성 잠재력이 높다는 의미다. 이런 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도 오른다. 이를 참고해 와인을 보관(셀러링)하거나 시음 적기를 판단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포도 작황이 좋아 와인 맛도 일품인 해를 일컬어 흔히들 ‘세기의 빈티지’라고 부른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최근 ‘세기의 빈티지’는 2016, 2015, 2010, 2009, 2005, 2000, 1990, 1982년이다. 부르고뉴는 2019, 2015, 2009, 2005년을 꼽는다.
그런데 빈티지 차트의 점수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아니다. 빈티지 차트의 점수가 낮아도 이를 역으로 활용할 수 있다. 숙성 잠재력이 낮은 대신 시음 적기가 빨리 온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여 합리적인 가격으로 고급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사실 빈티지 차트는 고급 와인을 고를 때 참고할 뿐이지 중저가 와인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발달한 양조술 덕분에 빈티지가 좋지 않은 해에도 평균 이상의 와인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와인을 잘 만드는 생산자들은 오히려 좋지 않은 해일수록 양조 실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들은 좋지 않은 해를 ‘나쁜 해’나 ‘망한 해’가 아니라 ‘어려운 해’라고 여긴다.
또한 프랑스 보르도나 부르고뉴, 북부 이탈리아나 독일처럼 날씨 변화가 잦은 구세계 와인을 고를 때는 차트가 유용할 수 있지만, 날씨가 고르고 좋은 신세계의 와인은 빈티지에 따른 차이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각자의 취향이 가장 중요하다.
차트 점수가 좋든 나쁘든, 어느 전문가가 ‘강추’하든 ‘비추’하든, 결국 와인은 자신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차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와인을 고를 때 차트는 여전히 중요한 지표다. 필요에 따라 또 와인에 따라 참고할 만한 자료로 차트만 한 것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글머리에 나이 세는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 그럼 와인은 어느 방식으로 나이를 따질까.
뜬금없지만 지구는 둥글다. 우리가 사는 북반구뿐만 아니라 남반구에서도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빚는다. 그런데 북반구와 남반구는 알다시피 계절이 반대다. 북반구에서는 포도를 9월에 수확하는데, 남반구에서는 3월에 수확한다.
이를 고려한 것인지는 몰라도 대략 6개월 차이가 나지만 와인 빈티지는 일괄적으로 ‘연 나이’로 표기한다. 엄연히 3월생이 있고 9월생이 있지만 같은 해 포도로 빚은 와인은 빈티지가 같다.
그런데 빈티지가 표기돼 있어도 그해에 수확한 포도만으로 와인을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릴까. 해마다 포도 작황이 균일하게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시장의 50년 된 사골 국밥집의 육수 맛이 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지역에 따라 5%에서 25% 정도는 다른 해의 포도를 블렌딩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여지를 두었다. 와인의 맛과 품질을 균일하게 유지하려는 방편인 셈이다. 날마다 맛이 달라지는 국밥집에 누가 믿고 가겠는가.
당해의 빈티지를 표기하는 규정은 와인 생산지마다 조금 다르다. 유럽 국가 대부분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그해에 수확한 포도를 85% 이상 써야 한다. 미국은 원산지 표기 유무에 따라 95% 또는 85% 이상, 칠레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75% 이상이면 그해의 빈티지로 표기할 수 있다.
다만, 이 규정은 ‘이 정도까지는 허용하자’는 법적 여지이다. 수준급 와이너리 대부분은 100% 그해 포도로만 와인을 빚는다. 의미가 살짝 다르지만, 과연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빈티지 붙지 않는 스파클링와인
한편, 빈티지는 ‘생년’ 말고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바로 그 뜻이다. 오래된 명품이나 특별한 것을 칭하는 경우다. 와인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포도 작황이 특별히 좋은 해에 만든 와인에 ‘빈티지’란 말을 붙여 ‘빈티지 와인’이라 칭한다. 주로 스파클링와인과 포트와인에 쓴다. ‘빈티지 샴페인’, ‘빈티지 포트’처럼 말이다.
빈티지 와인은 작황이 좋은 해에만 생산되다 보니, 지역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 해도 있다. 특히 빈티지 포트와인은 10년에 두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귀하고 가격도 비싸다. 오래된 빈티지 와인은 희소성이 있어 시간이 갈수록 값어치가 높아진다.
반대로 ‘빈티지’가 붙지 않는, ‘논빈티지 와인(Non-Vintage)’도 있다. 줄여서 NV라 부른다. 주로 스파클링와인에 사용하는데 두 해 이상의 와인을 블렌딩해 만든 와인에 쓰는 말이다. 여러 해 와인을 블렌딩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맛과 품질의 일관성뿐만 아니라 와이너리 특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생각해보면, 숫자 네 개로 적힌 와인 빈티지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후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산불일 수도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산자의 땀방울일 수도 있다.
이따금 와인 애호가들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빈티지의 와인을 구입한다. 이를테면 연인과 처음 만난 해 또는 아이가 태어난 해의 와인이다. 소중한 순간에 빚어졌으니,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빈티지 와인’인 셈이다. 어쩌면 세기의 빈티지는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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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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