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관우, 장비가 나오는 삼국지라는 소설에 적벽대전이라는 널리 알려진 전투가 있다. 조조의 대군과 손권-유비의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대형 전투인데 여기에 제갈공명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그 유명한 얘기가 나온다. 이때 제갈공명이 불러온 바람은 <동남풍>인가 <남동풍>인가? 물리적 방향은 같지만 이 질문의 초점은 동쪽과 남쪽 중 어느 것이 먼저 나오는가 하는 점이다. 동쪽이 먼저 나오는 <동남풍>인가 아니면 남쪽이 먼저 나오는 <남동풍>인가?
방위를 나타내는 기본 단위는 동-서-남-북 이렇게 넷이다. 이를 둘로 나누면 ‘동서’와 ‘남북’이 된다. 앞에서 제갈공명의 바람 얘기에서 다룬 문제는 ‘동서’와 ‘남북’이 동시에 표현된다면 어느 것이 먼저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아예 대놓고 물어보자. 동쪽과 남쪽 사이는 동남쪽인가 남동쪽인가? 즉 ‘동/서’가 먼저 나오는 ‘동남’쪽이 맞는 것일까, ‘남/북’이 먼저 나오는 ‘남동’쪽이 맞는 것일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둘 다 맞다. 동남풍도 맞고 남동풍도 맞다. 그렇다면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부린 바람도 동남풍과 남동풍 모두 맞다는 얘기가 된다.
오래전에 삼국지를 읽은 사람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하다... 적벽대전에 나오는 바람은 남동풍이 아니라 동남풍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내 기억에도 동남풍이니까. 그런데 지금처럼 동남풍도 맞고 남동풍도 맞는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양식을 따라가서 그렇다. 이런 것을 세계화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양은 방위를 표현하는 기준이 동서남북 중에서 ‘남’과 ‘북’이다. 그래서 동서남북 네 방위의 사이에 있는 방위의 표기가 북서(NW), 북동(NE), 남동(SE), 남서(SW)가 된다. 즉 북(N)이나 남(S)이 앞에 나온다. 영문자로 표기된 나침반을 들여다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항공사 중에 Northwest Airlines라는 회사와 Southeast Airlines라는 회사가 있었다. Southwest Airlines라는 항공사도 있다. 항상 북(N)/남(S)이 동(E)/서(W)보다 먼저 나온다.
여기서 문제 하나를 더 생각해보자.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이 속한 아시아지역은 <동남아시아>인가 <남동아시아>인가? ‘동/서’ 중의 ‘동’이 먼저 나오는 <동남아시아>와 ‘남/북’ 중의 ‘남’이 먼저 나오는 <남동아시아> 중에서 어느 게 더 익숙한가? 소리 내어 읽어보자. 동남아시아와 남동아시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동남’아시아가 더 익숙하다. ‘남동’아시아는 좀 부자연스럽다. 1960년대에는 연예인을 소개하면서 이름 앞에 ‘지금 막 동남아시아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이라는 표현을 붙이고는 했는데 그때 <남동아시아>가 아니라 <동남아시아>라고 말했다.
해방 후 극우단체 중에 <서북청년단>이라는 게 있었다. 여기서도 ‘동/서’의 ‘서’가 먼저 나오는 ‘서북’이라고 했지 ‘남/북’의 ‘북’이 먼저 나오는 ‘북서’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 원래 우리는 동서를 기준으로 했다. 그래서 제갈공명의 바람도 ‘동/서’의 ‘동’이 먼저 나오는 <동남풍>이었던 것이고 단체 이름도 ‘동/서’의 ‘서’가 먼저 나오는 <서북청년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은 앞에서 보았듯이 남북(South, North)을 기준으로 한다. South(남)가 먼저 나오는 SE(남동), North(북)가 먼저 나오는 NW(북서)처럼 말이다.
‘동’과 ‘서’를 기준으로 했던 우리의 방위 표현방식에 ‘남’과 ‘북’을 기준으로 하는 서양식을 받아들여서 이제는 동서남북 중 어느 것을 첫 글자로 하더라도 모두 표준어로 하기로 한 것 같다. 동남풍도 맞고, 남동풍도 맞고.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원래는 ‘동’과 ‘서’를 기준으로 적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학생 시절에 자석 때문에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두 가지의 자석을 배우는데 생긴 모양에 따라 막대자석과 말굽자석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석의 절반은 빨갛게 나머지 절반은 파랗게 칠해져 있었고 한쪽은 S, 다른 한쪽은 N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South)극과 북(North)극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S가 ‘남’이고 N이 ‘북’이라는 것을 무조건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시험에 나왔다. 1960년대는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권층임을 암시할 정도도 세계와 교류가 많지 않던 시절이다. S나 N이 무엇의 약자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라고 무지막지하게 머리에 우겨넣어야 하는 몹시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지남철’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자석이 항상 남쪽과 북쪽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에 남쪽(南)을 가리키는(指) 쇠(鐵)라는 뜻으로 지남철(指南鐵)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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