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6개월의 팬데믹 ‘노 쇼’를 견뎌낸 클래식 공연계가 2021-22 시즌부터 전격 무대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LA 오페라가 지난 18일 첫 공연의 팡파르를 울렸다. 아직도 팬데믹 와중이라 현장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백신접종카드 확인과 공연 내내 마스크를 써야했던 것, 공연 시작 전 국가를 연주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언제나 만석이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 빈자리가 꽤 눈에 띄긴 했지만.
개막 작품은 주세페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 이 오페라는 15년 전쯤 한인 오페라동호회 ‘보헤미안’과 함께 단체버스로 샌디에고 오페라까지 가서 처음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번 팬데믹 동안에 네 번이나 보았는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무료 스트리밍 덕분이었다.
메트는 작년 3월16일 팬데믹이 선언되자 공연을 모두 취소하고 대신 온라인으로 매일 오페라 동영상을 한편씩 내보내는 ‘나이틀리 메트 오페라 스트림스’(Nightly Met Opera Streams)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올해 7월말까지 16개월 71주 약 500일 동안 아카이브에 쌓여있던 수백편의 공연이 펼쳐졌다. 어찌나 인기가 좋았는지 152개국에서 매일 5만여 명이 시청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물론 나도 있었다.
하루 업무를 끝낸 저녁이면 met.org에 들어가서 매일 다른 오페라를 보았다. 짧은 것은 두시간, 바그너처럼 긴 것은 4시간이 넘었지만 이어폰을 낀 채 졸기도 하면서 이 웅장한 음악의 성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6개월쯤 지나자 레퍼토리가 바닥난 메트는 상영했던 작품들을 다시 틀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았던 공연은 보고 또 보았다. 왜 그렇게 강박적으로 오페라를 봤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인한 의식 저편의 두려움과 불안, 격리생활의 폐쇄적 일상에서의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세계최고 수준의 메트 오페라 공연을 집에 앉아서 즐기는 특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엄청난 스케일의 세트와 무대, 기막히게 정교하고 화려한 의상, (LA에는 거의 오지 않는) 세계정상급 지휘자와 가수들, 압도적 규모의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이 펼치는 공연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니, 마치 횡재한 기분이었다. 제대로 감상하자고 컴퓨터 스크린을 큰 것으로 바꿨고, 메트가 너무 고마워서 두 번에 걸쳐 도네이션 하기도 했다.
그렇게 200편이 넘는 오페라를 보았다. 있는지도 몰랐던 오페라, 알아도 본적이 없는 오페라를 보는 기쁨과 성취감이 무척 컸다. 세상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떤 오페라는 같은 프로덕션을 서너 번씩 보았고, 어떤 것은 다른 프로덕션과 출연진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느낀 것은 오페라를 감상하고 나면 영혼이 맑아진 듯 정화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비극의 완전한 슬픔에 잠기고 난 후에는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낸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을 읽거나 보고난 후의 감상과 비슷했다. 오페라와 그리스 비극의 공통점은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볼 때마다 다시 분노하고 슬퍼하고 감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만이 인간의 심성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니체가 말한 ‘숭고’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사랑과 배신, 복수와 죽음의 처절한 운명을 함께 겪으면서 내면의 불안과 긴장감이 해소되고 치유되는 경험이다. 운명이라는 절대적 한계 앞에서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 상승하려는 영혼의 초월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메트는 이 스트리밍을 끝내던 마지막 일주일에 그동안 시청자들이 가장 좋아했던 작품들을 상영했다. 최고 인기작은 베르디의 ‘가면무도회’였는데 여기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캐슬린 김이 조역을 맡아 기막힌 공연을 펼친다. 작고 사랑스런 캐슬린 김은 이밖에도 여러 오페라에서 노래했는데 매번 얼마나 특출 나던지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두 번째 인기작이 바로 ‘일 트로바토레’, 테너 이용훈이 주인공 만리코 역으로 열연한 공연이었다. 이용훈은 유럽무대에서 활약하는 정상급 가수이지만, 사실 이 프로덕션이 인기를 끈 이유는 세계최고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4년 전 뇌암으로 타계한 불세출의 바리톤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용훈은 두 명의 톱스타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전혀 밀리지 않고 강렬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지난 주말 LA 오페라가 무대에 올린 ‘일 트로바토레’는 기대를 많이 했건만 실망스러웠다. 베르디 작품 중에서 가장 어둡고 강렬하고 비극적인 오페라가 지루하게 늘어지는 연출과 단조로운 세트, 일부 실망스런 캐스팅으로 그 열정이 살아나지 못했다.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도 감동은커녕 카타르시스 비슷한 것도 느끼지 못했으니…. 메트의 공연을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일까? 한껏 올라간 눈높이를 이제 좀 낮춰야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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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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