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 오면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 현대미술관(SFMOMA)에서 하는 특별전을 보고 인근 와인산지를 여행하는 것이 작은 기쁨이다. 작년에는 팬데믹으로 쉬었지만 2019년에는 앤디 워홀의 대형 회고전을 보았고, 그 전해에는 뭉크 전을, 그 전에는 르네 마그리트를, 또 그 전에는 마티스/디벤콘 전시를 보았다.
올해는 백남준이었다. 그리고 이 전시는 그동안 보았던 모든 특별전을 압도할 만큼 최고였다.
백남준 하면 여러 개의 TV모니터가 돌아가는 이미지들이 떠오르지만, 그렇게 맥락 없이 한두 점 감상하는 것으론 백남준이란 희대의 예술가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나 역시 백남준의 50년 커리어를 입체적으로 소개한 이 전시를 보고난 후에야 처음으로 그의 천재성에 전율하게 되었다.
특히 청년시절 독일에서 그가 벌인 전위 행위예술의 기록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직접 보면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시장 초입에서 마주친 ‘손과 얼굴’ 비디오, 슈토크하우젠의 ‘오리기날레’ 퍼포먼스 동영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젊고 잘생긴 백남준이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은 충격이고 해방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산산조각 내는 퍼포먼스를 통해 서구의 ‘고급예술’을 파괴했고, 존 케이지가 매고 있던 넥타이를 싹둑 잘라버림으로써 권위와 형식에 저항했다. 이런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고 지금은 놀랍지 않지만 1960년대 초에 이런 ‘액션뮤직’은 예술계를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독일 언론이 그를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고 불렀던 것이 놀랍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백남준(1932-2006)의 삶과 예술은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불균형적으로 소개된 면이 있다. 해외에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유명해진 80년대 중반에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예술과 철학의 근원인 60∼70년대 행위예술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탓이다.
백남준은 근본적으로 음악가였다. 대부호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희귀했던 피아노와 전축이 있는 집에서 자라며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홍콩과 일본에서 미술사학과 미학,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논문은 ‘쇤베르크 연구’였다. 1956년 독일로 유학해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에서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했고, 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에서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면서 자유정신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음악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수십대의 TV 모니터가 숲을 이룬 ‘TV 가든’과 세계를 위성 생중계로 처음 엮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 바이 키플링’은 영상만큼이나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특히 좋았던 것이 거의 모든 작품에서 만나는 유머와 익살이다. 백남준이 추구한 인생의 재미(fun)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마지막 전시 룸에서 만난 ‘시스틴 채플’의 경이와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백남준의 작업은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고, 사실 그럴 역량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전 내가 만난 백남준, 그 잠깐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1988년 초, 샌타모니카의 ‘도로시 골딘’ 갤러리에서 서부지역 첫 백남준 초대전이 열렸다. 오프닝에는 주류 언론들이 잔뜩 몰렸고, 멜빵바지를 입은 백남준은 누구든 카메라를 들이대면 히죽 웃는 표정을 지어주는 모습이 꼭 ‘바보’ 같았다. 무슨 질문에든 단답형 또는 동문서답으로 말하는, 기자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그는 시끄럽고 복잡한 오프닝 와중에 나에게 인터뷰를 당하며 앉아서 졸기까지 했고, 나는 그를 깨워가며 질문하느라 진땀을 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송이 기자를 놀린 거였지 싶다.
그때 백남준 인터뷰와 예술세계에 관해 통판 2페이지 빼곡히 특집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 신문을 뉴욕으로 부쳐주었던가 보다. 시간이 꽤 지난 후 두툼한 봉투가 날아왔다. 열어보니 내가 보냈던 신문이 구깃구깃 아무렇게나 접힌 채 들어있었고, 기사 위에 붉은 색연필로 크게 친 동그라미가 보였다. 기껏 공들여 쓴 기사에 낙서를 해서 되돌려 보내다니,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려는 순간, 빨간색 한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빼어날 ‘수’(秀)였다. 아무 설명도 편지도 없고 단지 그것뿐이니, 해석은 내 몫이었다. ‘기사를 잘 썼다는 칭찬이구나’ 지금껏 나는 그렇게 ‘자뻑’하고 있다.
사실 백남준을 인터뷰하기 전 잔뜩 긴장했던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었고, 한국 서점이나 도서관도 없어서 자료 찾기가 힘들었다. 어렵사리 미국 신문기사들과 잡지비평들을 구해다가 모두 읽었는데, 그 덕에 백남준이 비디오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전위음악가로서 활동했던 이력을 종합적으로 쓸 수 있었다.
언급했다시피 그 때만 해도 한국 언론은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라는 사실만을 집중 보도했기 때문에 그가 음악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그 점이 기특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내용이 쓰인 부분에 동그라미를 치고 ‘秀’를 썼으니 말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참 엉뚱하지 않은가? 한자 한 글자 휘갈겨 쓴 신문지를 접어서 기자에게 다시 부치다니…. 그 신문지를 잘 간직한다고 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SFMOMA의 백남준 전시는 10월3일까지 계속된다. 미국에서는 1982년 뉴욕 휘트니 뮤지엄, 2000년 구겐하임 뮤지엄 이후 약 20년만이자 미 서부에서의 첫 회고전이다. 언제 다시 이런 전시를 만날 수 있을지, 많은 사람이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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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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