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가득 메우던 차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루가 다르게 도시는 비어가고 도로 한 끝에 위태롭게 서 있던 노숙자의 얼굴은 더위에 지쳐 점점 일그러져 갔다. 8월은 그렇게 왔다. 코비드로 굳게 닫아 두었던 빗장을 풀고 나온 사람들은 경쟁하듯 휴가를 떠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휴가에서 돌아 올 날을 기다리며 가게의 먼지를 털어냈다. 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소란스러웠으나 해가 저물자 온갖 소란스러움은 다시 어둠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늘 보던 일상이었지만 습한 공기에 질식할 듯한 나날이다. 창밖에 비스듬이 기대어 선 자작나무만이 이 소란스러움에서 한발 짝 물러 선 듯 보였다.
뉴욕 생활 8년여 만에 큰 아이가 조금 큰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지난해 코비드 영향으로 맨해튼의 렌트비가 많이 내려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가 혼자 이사를 하며 힘들었을 테지만 그동안 바라던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인지 행복해 보였다. 지난 해 도심의 작은 아파트에 갇혀 온갖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지내던 아이를 애써 외면하며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의 집은 고작 다운타운 쪽으로 열 블럭을 내려왔지만 그 몇 블럭을 사이에 두고도 새로운 세상이 열려 있었다. 도로의 한 차선을 점령하고 그 차선을 따라 간이 식당을 세운 식당들 마다 손님들이 가득했다. 그들에게는 일상이었겠으나 이 광경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유럽 여행이라도 온 듯한 설레임을 느끼게 했다. 식당 사이를 비집고 아파트가 있는 빌딩을 찾아 들어가야 아이의 새 집이다. 도심의 집들이 다 그만그만 하더라도 큰 도로를 벗어난 한적한 곳에 집을 구했기를 기대했지만 아직은 형편이 여기까지 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점심은 아파트 아래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차도를 점령하고 만든 임시 공간이었기에 간이 벽 너머 한뼘 사이로 차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뜨거운 햇볕아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고 여유마저 느껴졌다. 식사에 곁들인 와인 때문인지, 높은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빛이 땅에 닿으며 부서지는 탓인지 불분명 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세심하게 잘 다듬어진 선율처럼 어우러져 몸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문득 탱글우드의 야외 공연장에서 듣던 관현악 연주를 떠올렸던것 같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미소에 눈 인사로 화답하다 그들 등 너머로 어른 주먹만한 자물쇠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의 다른 한쪽 가게의 셔터문이 내려져 있는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코비드 이전에는 성업하던 식당이었으리라 짐작되었을 뿐이다. 내려진 셔터와 그 위에 채워진 묵직한 자물쇠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오랜 세월을 주변의 다른 식당들과 함께 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한쪽은 사라졌고, 다른 한 쪽은 사라지지 않기위해 아득하던 시절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었으리라.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짊어진 무게를 감당하느라 모른척 외면해 버린것도 있었다. 더위에 지쳐가는 노숙자의 얼굴, 낯설게 느껴지던 오랫만에 만난 친구, 화들짝 한밤중에 찾아오는 지인의 부고, 계절을 바꿔 타지 못한 채 그 끝자락에서 멈춘 꽃들, 그리고 이제 잘 떠오르지도 않는 이름의 그리운 얼굴들이 빠르게 머리속을 스친다. 생은 늘 엄숙했고, 슬퍼하고 노여워 할 겨늘도 없이 지나쳐 간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여전히 마음 한켠이 텅 빈듯 쓸쓸해짐은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무심히 그 길을 지나쳐 갔고 사라진 식당에 대해 더 이상은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그러할 것이다. 짧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숱한 만남과 그만큼의 헤어짐을 목도했었다. 이유는 명료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억울한 심사이거나 더 이상 서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경제적 득실의 결과였다.
그러나 새로운 만남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헤어짐에 익숙해 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의 인내를 요구했다. 많은 경우가 나의 성격이나 나의 그릇된 이기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 때로는 상대에 의해 내가 온전히 피해를 당하기도 했었다. 그때의 상실감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분노로 이어지기도 했다. 상실감에서 벗어나고자 그렇수도 있겠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수습하기 어려운 이 모든 감정의 혼란은 우리의 일상이 원인과 결과에 맞춰 사고하는 탓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읽어 내지 못한 감정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남과 헤어짐으로 나눈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았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떨쳐내지 못한 채 평범한 일요일이 지나가고 있다. 애써 생각을 지우려 오랫동안 책을 읽었고, 책을 읽는 내내 오지 않는 메일을 기다렸다. 책을 읽었으나 메일을 기다렸다고 쓴다. 가끔은 시계를 쳐다 보았으나, 시간이 참 더디게 지나간다. 이제 겨우 오후 3시 반이다. 창 밖에 서 있는 나무가 오늘따라 더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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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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