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만 잘했어도….”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버지니아에서 일하면서 메디케이드 신청을 도와 드릴 때나 선거를 위해서 투표용지를 해석해 달라고 문의전화가 오면 항상 듣는 말이다.
100여장이 넘는 빽빽한 메디케이드 관련 정보들과 혜택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신청하기 힘들어 하시는 어르신들,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홀로 투표소에 가려고 하지만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없거나 우편투표가 안내문인지 투표권인지 구분하기 어려우신 분들, 미국에서 자기 권리를 찾는 건 영어를 못한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족히 15시간 이상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땅. 불과 400년 전만 해도 오지의 땅이었던 미국은 2021년 올해에도 수많은 청년들과 외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선사하는 ‘선진국,’ ‘부자가 되는 땅’이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의 이민도전을 시작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미국 땅을 밟았고 미국 사회에 첫 발을 디디며 한인사회를 이루어 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108년이 지난 지금, 영어를 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나라이다. 미국 전역에 한인 인구만 186만명(2015∼2019년 아메리칸 지역사회조사(ACS) 인구현황 추산 자료)에 달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뉴욕 등 한인 밀집지역 외에는 한국어를 보거나 듣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
미국은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 한인 가족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자녀들에게 영어 통역과 번역을 맡긴다. 보통 자녀들이 먼저 학교를 다니고, 영어도 빨리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부모는 점점 자녀를 의지하게 되고, 자녀들은 부담을 갖게 되면서 가족 안에서 역동이 일어난다.
필자 또한,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병원이나 DMV(차량관리국)를 방문할 때마다 통역과 번역을 도왔다. 어릴 때부터 이런 막중한 책임감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번역이나 해석이 잘못되어서 일어날 수 있는 좋지 않은 상황들 때문에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자녀가 영어 습득으로 인해서 모국어를 잊어버리게 되어 결국 부모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지고 가족관계가 소원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를 의지하게 되면서 점점 미국의 소수자로서 위축되며, 이러한 영향으로 낮은 자존감과 영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삶을 제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인사회를 벗어나 어떠한 도전이나 모험을 기피하게 된다. 언어(영어)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고충을 겪으며 괴로워하는 한인이 많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그나마 한인사회에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교회와 한인 사업체, 그리고 한인회 등은 문을 닫거나, 소수에 한해 문을 열었다. 전염병에 가장 취약한 노년층은 모두 집에 머물러야 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대책을 세우고, 백신접종을 통해 이 어려운 사태를 이겨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백신 정보나, 실업자를 위한 실업수당 등의 정보들을 얻는 데에 여전히 어려움은 많다. 버지니아만 해도 한인 인구가 대략 9만 명이나 되는데, 버지니아 보건기구(Virginia Department of Health)와 버지니아 고용위원회(Virginia Employment Commission) 등 가장 중요한 주 정부 기관 웹사이트들은 모두 구글 번역기로 정보가 제공되고 있으며, 기계로 자동번역이 되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문맥이 잘못되어 이해에 고충을 느낀다. 게다가 백신에 대한 질문이나 예약을 위해 전화 통화시 현재 6개 국어로 지원이 되지만 결국 연결되는 것은 영어를 사용하는 상담원이다.
버지니아 고용위원회 또한 말할 필요도 없다. 1964년 통과된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of 1964)으로 타이틀 6(Title VI)은 인종, 민족, 출신 국가 그리고 소수 종교와 여성을 차별하는 주요한 것들을 불법화시킨 미국 민권 법제화의 기념비적 법안 중의 하나이다. 이 법안에는 물론 LEP(Limited English Proficiency: 영어 능력이 미숙한) 커뮤니티를 위해 주 정부 기관에서는 통역과 번역이 제공되어야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있다.
현재 버지니아 주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주 정부기관에서 백신 등 주요 정보들에 대해서 당연히 평등하게 배급되어야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최근에 애틀랜타 총격사건으로 인해 아시안 아메리칸의 평등과 억압된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언어는 그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며, 개개인의 권리, 문화, 그리고 정체성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가 더 개방되고 주요 정보들이 제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된다면, 팬데믹을 이겨내는 과정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언어에 있어서 사람들이 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전체 아시안 사회가 존중받고 더 이상 차별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가족간에 부정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어질 것이다. 그 결과 다양한 인종의 커뮤니티들이 미국 사회에 당당히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질 것이라 사료된다. 더이상 영어로 의사소통을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과 무시를 당하거나,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불이익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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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성 / 애난데일, V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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