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한국의 대표적 애국열사 안중근 하면 왠지 가슴이 서늘해지며 숙연함을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집안을 책임질 장남으로서 홀어머니 도리를 따지며 극구 반대하는 두 동생에게 떠맡기고 대의를 따라 주저없이 집을 떠난 단호함이나, 북간도 연추에서 12명의 애국 동지와 함께 약손가락을 잘라내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한문으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쓰셨던 초인적 결기가 연상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대한남아 안중근’으로 쓰기를 좋아한다. 한참 뒤 안 의사의 붓글씨 유묵을 자세히 보니 단지한 손 낙관 위에 ‘대한국인 안중근’ 으로 휘호하신 것을 보니 안 의사 자신은 국적을 분명히 하신 데 반하여 나는 헌출하시고 시원한 눈매에 행동이 단호하신 인물에 초점을 맞춘 차이일 뿐, 신통하리 만큼 잘된 별칭을 헌사했다고 웃어본 일이 있었다.
순국일을 맞아 의사의 자취를 회고해 보면, 1879년 9월 2일 순흥 안씨 참판공파 진사 안태훈 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으나 6세 때 신천군 청계동이라는 산자락으로 이사하셨다.
불과 16세 때는 아버지를 따라 동학도를 빙자한 폭도들을 진압하셨고 이 해에 결혼도 하셨다. 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시어 프랑스인 신부 홍석구를 따라 황해도 각지를 돌며 전도를 하시어 견문을 넓히셨다. 27세에 일본의 불법 침략을 세계각국에 알려 국권을 회고하고자 청국 상해 등지를 여행하셨는데 이것이 가능하셨던 이유는 할아버지가 상업으로 황해도에서 셋째 가는 부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해 28세 때 평양의 외항인 진남포로 이사하시고 가산을 기울여 돈의(敦義)초급학교와 삼흥(三興)중급학교를 설립하시고 구국 영재교육에 나서셨다.
1907년 29세에 일본의 조선군대 강제 해산의 참상을 보고 북간도로 가셔서 37개월을 머무신 후 일본군의 북간도 진출에 따라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활동 기지를 옮기셨다.
다음해 30세에 독립의군을 결성하고 몸소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 되시어 두만강을 건너 6진 지역 진입작전을 펼쳤으나 회령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시게 되었다. 다음해 연해주 하리에서 12명의 동지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쓰시며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하늘과 땅에 맹세하는 동의단지회 회장이 되셨다.
그리고 드디어 역사의 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발의 총탄을 명중 격살시킴으로써 통쾌한 응징의 대장정을 마감하셨다.
이듬해 1910년 2월 14일 일제의 법정에서 6차례의 공판 끝에 사형이 언도 되었다. 공판이 계속된 이유는 안 의사가 ‘동양 평화론’을 주창하시며 자기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다 체포된 것이니 군사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불복하셨기 때문이며 상고를 하지 않은 이유는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동생들을 면회 보내어 사형이 언도 되거든 큰 일을 하였으니 떳떳하게 죽음을 맞을 것이지 일제 법정에 상고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수의까지 지어 보내셨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상고를 포기하고 평온한 일상과 집필에 열중하시는 태연함에 일제 옥리들이 어리둥절하였고 서울의 ‘대한 매일신보’ 는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시모시자(是母是子)라는 기사까지 실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가정교육과 가풍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오늘은 의사 순국 111년 만에 살아있는 의사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 보기로 한다. 1907년 8월 1일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엄중한 사찰로 북간도로 떠나는 날 진남포 남문밖 정거장으로 전송 나온 정근과 공근 두 아우에게 간곡한 당부를 하셨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단합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겸손의 미덕이 적고 허위와 교만으로 일을 처리하며, 남의 위에 있기를 좋아하고 남의 밑에 있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이 허심하게(마음을 비우고) 좋은 것을 배워 익히고 자기는 낮추고 남은 존중하며 사회에 해독을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 ~ 하느님이 (우리나라에) 화(禍)를 내리신 것을 후회하실 때면 우리들도 나라를 되찾을 날이 오게 될 것이고 우리 형제들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나의 뼈를 어디서 찾을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은 동생들의 어깨를 넘어 100년 뒤의 우리를 향한 의사의 간절한 호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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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 전 한국학교협의회 전국 및 워싱턴 이사장,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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