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아시안을 향한 증오범죄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중국 우한 바이러스라고 트럼프가 말하면서부터 시작된 아시안을 향한 증오는 미국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그 도를 넘고 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그리고 의식 있는 시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안에게 인종차별적인 행동과 말투로 몸살을 앓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같은 약자에게 돌아오고 있다. 그동안 드러내 놓고 인종차별을 하지 못했던 조용한 숨은 미국인들이 이제는 대놓고 그 증오심을 폭발하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걸까? 잘 알다시피 흑인 인권운동이 시작된 시점은 마틴 루터 킹이 주장한 민권법이 통과된 1964년부터였으니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50여년 전 일이다. 킹 목사는 흑인뿐 아니라 인종이나 피부색 종교 그리고 성이나 민족을 이유로 고용에서 차별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짓는데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그 위대한 업적으로 킹 목사는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 힘으로 우리 같은 소수민족이 법적으로 차별받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 업적과는 무관하게 실제로 살아가는 흑인과 우리 아시안 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흑인은 한국으로 봤을 때 사원, 주임 등 시작단계 직위에 해당하는 흑인 비율은 12%로 전체 흑인 노동자 평균과 거의 같은 수치다. 그러나 관리직에 해당하는 매니저(과장이나 부장 등) 직위에서는 흑인 비율이 7%로 평균을 훨씬 밑돌았다. 이는 관리직 백인 노동자 비율(66%)의 거의 10분의 1 수준이고, 아시아계(15%), 히스패닉(8%) 등 다른 인종에 비해서도 낮은 수치다. (2021. 3. 4 미국 저널)
이러한 수치로 보면 아시안들은 흑인 인권운동의 시발점으로 숟가락 하나 얹고 무임승차로 쉽게 정착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오히려 그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소득 격차와 함께 인식의 격차도 벌어져 보이는 듯하다. 흑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일자리를 부지런함으로 무장된 아시안들 특히 한인들에게 빼앗겼다 생각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LA 폭동이나 볼티모어 폭동이 같은 맥락이다.
아마도 그들 눈에 비친 동양인은 흑인들에 의해 어렵게 허문 인종차별의 벽을 어물쩡 올라탄 비슷한 인종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지위와 경제력을 뒷받침으로 오히려 그들을 역차별하는 모양새로 보여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밥을 나누어 주었더니 이젠 밥그릇을 빼앗으려 하니 밥을 준 자가 참지 못하고 몸집으로 누르려 하는 것과 같다.
1970년대 아프리카 노예 쿤타킨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뿌리’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흑인 노예로 처절한 인생을 사는 쿤타킨테는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붙잡혀 미국으로 끌려와 험난한 수난과 자유를 찾는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로 인해 인종과 관련한 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사람들이 생각될 만큼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유럽 사회는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한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한 종자로 취급하고 노예라는 신분으로 하대하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흑인이 대신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 내용이 각색되어 고스란히 전파를 탔고 흑인은 그저 미국인의 노예라는 사실에 점을 찍어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고정관념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 링컨이 노예해방을 시켰던 킹 목사가 흑인 인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켰건 뿌리 깊은 차별의 잔재는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에도 흑인을 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 본토에서도 힘없이 당하는 흑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흑인이나 아시아의 소수민족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당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고, 내가 간만큼만 안다고 하지 않은가? 내가 미국에 살면서 겪는 많은 일 중에 아시안이기에 당하는 언어와 피부의 차별을 그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게 진심 어린 과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다. 일본은 어떻게 더 많은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하고 한국 사람들의 사과 방식에 반기를 든다. 하지만 진정한 사과는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 느껴야지만 제대로 된 반성이고 사과라 할 수 있다. 흑인을 노예로 규정지었던 유럽 사람들 그리고 그 전통을 그대로 미국에까지 가지고 온 미국 사람들, 인종차별을 당연시하며 조용하게 뒤에서 움직이는 백인 그리고 그들에게 암암리에 동조하는 우리 같은 소수 민족들… 모두 반성하고 인간적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그들에게 해야 한다. 그러한 진정성이 있을 때 아시안과 흑인의 조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