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1년 가까이 계속되어오는 동안, 많은 가정이 그러하듯 우리 집에서도 꽤 많은 정리와 청소가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쌓아만 두고 사용하지 않던 부엌용품, 가전제품, 의류 및 잡동사니들을 과감하게 처분했고, 비좁던 공간들이 조금이나마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결코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도 버리지 못한 물품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레코드판들이다. 40년전 이민 짐에 꾸려온 것들부터 얼마 전 친지의 거라지에서 추려온 명반들까지, 차곡차곡 쌓인 수백장의 LP는 냉혹한 이번 사정바람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 보게 된 통계 때문이었다.
빌보드와 MRC 데이터가 내놓은 2020년 미국음악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LP 수요가 급증해 2,754만 장이 판매되었다. 이는 전년과 비교해 거의 두 배이며, 30년 만에 최다 판매기록이라고 한다. LP레코드의 전성기는 미국에서만 3억4,100만장이 팔린 1978년이었다. 그러다 CD와 디지털음원의 등장으로 급격히 쇠락하면서 93년 30만장으로 최저점을 찍었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조용히 LP 복고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미국 음반산업협회에 따르면 LP 판매량은 2007년 99만장에서 2015년 1,200만장으로 급증했다. 턴테이블과 레코드점의 숫자도 덩달아 증가했다. 이에 힘입어 최근 음반사들은 과거의 명반을 다시 발매하고 있고, 가수들도 새 음반을 LP로도 출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주 소비층이 18~24세의 젊은이들이란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 아날로그 라이프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 레코드판과 턴테이블을 본 적도 없고 판에 바늘을 올리는 법도 모르는 아이들이다. 사실 우리 집 레코드판들도 아들의 철통방어로 살아남은 측면이 있다.
아날로그로의 회귀는 레코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초 뉴욕타임스는 2개의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는데 하나는 비디오테입과 카셋테입을 모으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구형 컴퓨터를 수집하고 수리하는 젊은이들에 관한 기사다.
VHS는 1976년 일본에서 처음 나왔고 2006년 단종됐다. 이를 트는 VCR 플레이어는 2016년 마지막으로 제작된 후 사라졌다. 한때 9,000여개의 체인을 거느렸던 비디오대여점 ‘블록버스터’는 현재 오리건 주에 단 한 곳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VHS를 사 모으고, 수천개를 소장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한편에 보통 190달러, 1989년 한정판으로 나온 디즈니의 ‘리틀 머메이드’는 4만5,000달러를 호가한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들은 “스트리밍으로 볼 수 없는 영화들도 많다”며 VHS 컬렉션의 실체와 가치를 자랑한다.
‘레트로컴퓨팅’은 좀더 조직적이다. 집집마다 오래전에 내다버린 구닥다리 컴퓨터에 열광하는 이들은 수리가 필요하지만 파트가 단종되어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PC들을 찾아다닌다. 이베이나 소셜미디어, 유튜브에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사고팔고 교환하면서 동호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가장 큰 빈티지컴퓨팅동호회 ‘레트로 배틀스테이션스’는 2018년 회원이 2만3,000명이었는데 올해 초 5만8,000명으로 늘었다. 팬데믹 격리시대에 특별히 각광받은 취미다.
물론 이걸 컴퓨터로 사용하려는 건 아니다. 다시 고치고 조립하고 작동하게 함으로써 성취감을 느끼고, 과거의 세상과 연결감을 갖는 것이다. 비용도 적지 않게 든다. 아미가 컴퓨터, 아타리 ST, 코모도어 64, 인텔 펜티엄 III 등의 부품을 온라인에서 사서 조립하는 데는 5~600달러가 들지만 오래된 컴퓨터일수록 구하기 어렵고 훨씬 비싸다.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1으로, 최근 한 옥션에서 50만달러 가까이에 팔린 기록이 있다.
레트로 열풍을 다룬 책 ‘아날로그의 반격’(데이빗 색스 저)에는 디지털카메라와 아이폰의 시대에 필름카메라를 재발견하는 젊은이들 이야기가 나온다. 한창 때 미국에서만 한해 8억통이 생산됐던 필름은 디카의 등장으로 끝 모를 추락의 길을 걸었다. 폴라로이드는 2002년 도산했고, 코닥사는 2012년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즉석카메라의 매력에 빠진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중고폴라로이드와 인스탁스 즉석카메라의 판매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인스탁스 카메라는 2005년 10만대에서 2015년 600만대로 10년 사이 60배나 늘었다. 필름은 연간 4,000만 팩씩 팔리고 있다.
디지털 세대가 아날로그에 빠져드는 이유는 ‘물리적 경험’ 때문이다. 빠르고 편리하고 완벽한 디지털 라이프 대신,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한 아날로그 라이프에서 특별한 정서적 기쁨을 얻는 것이다. 턴테이블에 레코드판을 올리고 바늘을 내려 음악을 듣는 일, 필름을 카메라에 넣고 셔터를 누르는 일, 좋아하는 영화의 비디오테입을 돌려보는 일, 모두 촉각적이고 경험적이면서 ‘소유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영상이나 음향의 질은 좋지 않아도 “거칠지만 따뜻하고 풍성하다”는 것이 아날로그에 대한 젊은이들의 공통적인 감상이다. 점점 더 가상의 세계가 커져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클릭이 아니라 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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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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