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플TV 다큐 ‘더 월즈 어 리틀 블러리’ 리뷰
[ 로이터 = 사진제공 ]
"너무 이상해요.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여러분은 왜 날 이렇게 사랑하나요?"
무대에 걸터앉은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가 스탠딩 객석을 가득 채운 팬들에게 묻는다. 팬들은 고막을 찢을 듯한 환호로 대답을 대신한다.
지독하게 우울증을 앓던 소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학대하던 2001년생 아일리시는 어떻게 미국 Z세대의 마음을 파고들었을까.
애플TV가 26일 공개한 다큐멘터리 '빌리 아일리시: 더 월즈 어 리틀 블러리'(Billie Eilish: The World's A Little Blurry)에서 이에 대한 답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아일리시가 첫 번째 정규앨범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제62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5관왕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2시간 20분에 걸쳐 담아냈다.
인터뷰는 최소화하고 아일리시와 그의 가족, 그리고 팬들의 모습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렸다. 과거 찍은 홈비디오와 무대 뒷이야기, 월드투어 공연 영상도 곁들였다.
인터스코프 필름이 제작하고 J.R.커틀러가 감독을 맡았다.
다큐멘터리는 아일리시가 친오빠 피니즈 오코널과 함께 만든 곡 '오션아이즈'를 듣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일리시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물기 어린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온다.
'바다 같은 그 눈동자를 보는 걸 멈출 수 없었지 / 불타는 도시들과 네이팜탄 같던 하늘 / 15개의 불꽃이 바다 빛 눈동자 안에서 빛나고 있었지…'
아일리시의 거의 모든 음악에는 음울하고 불안한 정서가 녹아 있다. 가사 역시 자기 혐오적이며 때로는 파괴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가 우울했던 10대를 지나며 느낀 생생한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14∼15세 때 여러 차례 자해를 하고 화장실에 자신을 가둬놓았다며 "나는 그런 취급을 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저는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왜 제가 모르는 것들을 가지고 곡을 써야 하나요? 전 어두운 것들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런 것을 주제로 얘기를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그의 음악은 미국 대중 특히 또래인 10대들로부터 신드롬에 가까운 호응을 얻었다. 2019년 내놓은 정규 1집 '웬 위 올 폴 어슬립, 웨어 두 위 고?'(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이하 '웬 위 올')는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정상을 차지했고 전 세계적으로 약 1천200만 장 판매됐다.
아일리시는 이 앨범에서도 자각몽, 밤공포증 등 어두운 주제를 음악으로 풀어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녀다운' 이미지를 정면으로 깨트렸다.
일부 기성세대는 아일리시 음악을 소위 '중2병'에 걸린 청소년이 쓴 조악한 글 정도로 깎아내릴지 모른다.
그러나 아일리시의 음악과 그에 열광하는 팬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Z세대가 살아온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로 가정이 붕괴하는 것을 목격했고 약물 중독, 기후 변화 등에 대한 공포를 안고 성장했다.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인종 차별과 이민자·소수자 혐오가 일상화된 세상을 겪었고 최근에는 팬데믹을 맞닥뜨렸다.
아일리시의 어머니는 "지금은 10대로 살아가기에 너무나 끔찍한 시기"라고 힘줘 말한다. 스스럼없이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는 아일리시의 음악이 또래들로부터 공감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빌리의 음악이 너무 어둡다고 말해요. 10대들이 겪는 우울함이 '가짜'라고도 말하죠. 하지만 아이들은 정말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우울함을 느낄 요소들이 무척 많습니다."
아일리시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데는 가족의 공이 컸다. 그는 "가족은 내가 이 길에 있을 수 있는 이유"라고 말한다.
아일리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오빠와 함께 홈스쿨링을 했고 예술가인 부모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오빠 오코널에게는 "네가 작곡을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난다"며 밉살스럽게 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한 몸이나 다름없는 음악적 동반자다. 오코널이 아일리시와 노래를 만들면 아일리시가 자신만의 색깔로 이를 소화한다. 그 과정에서 의견을 주고받고 때로는 언쟁도 한다.
'웬 위 올' 역시 이렇게 탄생했다. 모든 곡 작업은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아일리시 가족의 집, 정확히 말하면 오코널의 방에서 했다.
아일리시는 대형 스튜디오 대신 낡은 주택에서 만든 이 앨범으로 이듬해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즈'에서 4대 본상인 '제너럴 필즈' 부문을 모두 휩쓰는 파란을 일으켰다.
1981년 크리스토퍼 크로스 이후 39년 만이자 여성 아티스트로는 최초였다.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최연소 수상자 기록도 갈아치웠다.
아일리시는 상을 받는 내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미 후보로 지명됐을 때도 들뜬 얼굴로 "누가 그래미에 6개나 노미네이트 됐지?"라고 말하며 마당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그래도 그가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할 때는 팬들 앞에서 공연할 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다리를 다쳐도 "난 바보니까 오늘 마구 점프할 거야"라며 무대를 가지고 논다.
"관객들을 볼 때면 그들의 아픔도 보여요. 제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 바로 음악을 하는 거예요. 왜냐면 저도 그들과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거든요. 전 팬들을 단순히 팬이 아니라 제 일부처럼 느껴요."
아일리시는 혼자 있을 때면 종종 그늘이 진다. 익명의 누군가가 온라인에 올린 글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몹시 불안해하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인다.
"난 그래미에 6개나 노미네이트 됐어. 드림카도 갖고 있고 가족들도 행복하지. 난 예쁘고 또 유명해."
다큐멘터리 막바지에 홀로 차를 운전하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그만 나 자신을 사랑해주자는 자기 암시처럼 들린다.
스무 살의 아일리시는 팬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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