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달러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폐권이다. 이 돈의 앞면에 새겨진 인물은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다. 그런데 머잖아 그 얼굴이 흑인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엣 터브먼으로 바뀔 전망이다. 지난 25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연방재무부가 터브먼을 20달러 지폐에 넣는 계획을 신속히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계획은 원래 2016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추진됐었다. 노예제를 강력 옹호했던 앤드류 잭슨을 밀어내고 최초의 흑인여성을 미국 지폐에 넣는다는 점에서 여성계를 비롯한 각계의 전폭적인 지원과 호응이 있었고, 여성참정권 100주년이던 지난 2020년에 새로운 지폐 도안이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바로 그해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무산됐다. 트럼프는 잭슨의 열렬한 팬이다. 취임 직후 백악관 집무실에 잭슨의 초상화를 걸었고, 그의 묘지와 생가를 방문까지 했다. 그런 그가 잭슨이 20달러 뒷면으로 밀리도록 놔둘 리는 만무한 일. 2019년 스티븐 므누신 전 재무장관은 “2028년까지 20달러 지폐가 교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트럼프는 한술 더 떠서 “터브먼은 20달러가 아닌 2달러 지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달러 지폐는 2003년 이후 발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 계획 자체를 없애라는 뜻이다.
미국 달러화의 인물은 모두 백인남성이고, 대부분 ‘건국의 아버지’거나 노예제를 옹호했던 사람들이다. 1달러 지폐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2달러 지폐에는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10달러에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50달러에는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100달러 지폐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쇄돼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폐지한 사람은 5달러 지폐에 인쇄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한사람뿐이다.
화폐는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지폐인물은 최근까지 남성 일색이었다.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와 역할이 그만큼 무시되고 사장돼왔음을 뜻한다. 그나마 유럽은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이 지폐에 나오고 등장 시기도 이른 편이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 세계 화폐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나온 여성이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 1954년부터 2011년까지 영국을 비롯한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에 속한 20여 국가의 다양한 지폐에 다양한 시기의 여왕 얼굴이 인쇄돼있다.
독일은 1986년에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슈만을 100마르크 지폐에 넣었고, 1991년 20마르크와 500마르크 지폐의 얼굴을 시인 드로스테 휠스호프와 곤충학자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초상화로 바꿨다.
프랑스는 노벨상을 두번 수상한 퀴리 부인을 1994년 500프랑 지폐에 넣었고, 이탈리아는 1990년 아동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를 1,000리라에 인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화폐들은 1999년 유럽 단일화폐 유로가 도입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은 2009년 처음 발행된 5만원권에 신사임당의 초상을 넣었다. 이미 5,000원권에 율곡 이이 선생이 들어있으니 어머니와 아들이 지폐인물이 된 세계최초의 사례다. 두 사람의 지폐 초상을 모두 영정화가 이종상 화백이 그린 것도 특별한 기록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지폐 모델이 될 해리엣 터브먼(Harriet Tubman, 1822∼1913)은 메릴랜드주 농장 노예로 태어나 숱한 폭행과 학대 속에 살다가 1849년 노예제가 폐지된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 이때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는 점조직으로, 19세기 중반 수천명의 남부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게 도운 비밀조직이다. ‘지하철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터브먼은 곧바로 자신이 연락책이 되어 다른 노예들을 탈출시키기 시작했고, 1850년부터 10년 동안 300여명의 흑인을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 없이 구출해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북군의 스파이가 되어 남부군의 중요한 군사정보를 빼돌렸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을 돕는 군사 고문이 됐다. 1863년 무장군대를 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콤바히 강을 따라 700여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습격작전을 감행해 북군들에게는 ‘터브먼 장군’으로, 흑인들에게는 ‘검은 모세’ 혹은 ‘모세 할머니’라고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는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으며, 죽을 때까지 가난한 흑인들을 돕고 평등과 인권을 위해 헌신한 삶을 살았다.
‘20달러에 여성을’(Women On 20s) 단체가 2015년 실시한 투표에서 해리엣 터브먼이 엘리노어 루스벨트와 로자 파크스를 물리치고 선정된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겐 앞의 두 여성만큼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0년전 노예로 태어나 이처럼 용감한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은 찾기 힘들 것이다. 하루 빨리 그녀의 얼굴을 20달러 지폐 앞면에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2월은 ‘블랙 히스토리의 달’이다. 미국의 역사와 문화가 다양성을 포용하기를 원한다면 흑인 역사도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난 20 불짜리필요없어 10 불짜리많이있으면되 ㅋㅋㅋ
가만보면 미국인들처럼 (특히 백인 보수들과 개신교인들) 꽉 막힌 사람들이 없는것같읍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과학분야에서 앞서고 있는것은 머리가 깬 몇몇의 천재두뇌들이 있기때문인것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