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자 교육섹션에 ‘건국의 아버지들’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 시리즈에서는 뉴저지와 워싱턴 지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이종권 씨가 한글로 번역한 역사서 ‘The Book of the Founding Fathers’에 수록된 미국의 정신과 미국 건국에 가장 의미 있게 공헌한 인물, 독립이라는 꿈을 품고 키웠던 용기 있는 지도자, 세계 최초의 연방 민주주의로 실현해낸 사람들 35인을 조명한다. 존 애덤스,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등 미국에 사는 우리가 필수 교양으로 꼭 알아두면 좋을 인물들이 매주 1명씩 소개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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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핑크니의 약력
△1757년 10월 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출생 △1775-76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행정협의회 △1779-80, 1787-87년, 1805-06년, 1810-14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입법부 대의원 △1779-81년 민병대 대위 △1784-87년 연합회의 대의원 △1787년 제헌회의 대의원 △178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비준회의 대의원 △1789-92년, 1796-98년, 1806-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1801-05년 스페인공사 △1819-21년 합중국 하원의원 △1824년10월 29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영면
“나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박동하지 않는 혈관이 있다면 나 스스로 그것을 열어젖힐 것이다” - 교육은 영국에서 받았으나 새로운 국가에서 남부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바로 이 남부 애국파의 충정이다.
찰스 코트워스 핑크니는 연방주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 1804년에는 제퍼슨에게, 그리고 1808년에는 매디슨에게 패배하여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용감했던 군인으로, 합중국 헌법의 서명자로, 그리고 1798년 프랑스 파견 사절로 기억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국방을 위해서라면 백만불도 지불하겠으나 조공이라면 1센트도 낼 수 없소!” (“6펜스도 낼 수 없소”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라고 일갈하며 장막 뒤의 뇌물 요구를 거부했다.
핑크니는 옥스퍼드 대학의 윌리엄 블랙스톤 문하에서 법학을 수학한 후 프랑스에서 왕립사관학교를 다녔다. 거기서 받은 훈련은 미국으로 돌아와서 1775년 대륙군 대위로 임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1780년 영국군이 찰스턴을 점령하였을 때 포로가 되기도 했다. 종전시 그의 계급은 준장이었다.
전쟁 이전부터 핑크니는 애국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775년 그는 지역방위를 책임지는 단체의 대원이었고 1776년 2월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임시정부 수립 계획안 작성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제헌회의에서 핑크니는 남부의 이익과 주권을 완고하게 옹호했다. 그는 대중선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지만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 헌법에 서명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비준회의에서 (헌법을) 지지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가장 성공적인 변호사 가운데 한명이었던 핑크니는 워싱턴으로부터 대법원 판사직을 제안 받았지만 고사했다. 후일 워싱턴이 전쟁부장관과 국무장관(1795)직을 제안하였으나 역시 사양했다. 그러나 1796년 그는 프랑스 공사직을 수락했고 프랑스에 도착하자 프랑스 집정부(French Directory)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네덜란드로 갔다. 1797년 애덤스 대통령은 핑크니와 존 마샬 그리고 엘브리지 제리를 프랑스 사절단으로 임명하여 양국간 이견조정을 시도했다.
그런데 세 사절은 X, Y, Z (가명)라는 프랑스 관료들에 의해 모욕을 당하였고, 그리하여 핑크니는 그 유명한 일갈을 퍼부은 후 일종의 영웅처럼 본국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그는 새롭게 창군한 합중국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합중국 육군은 프랑스와의 갈등 때문에 워싱턴이 급조했으나 1800년까지 긴장은 해소되었다.
핑크니는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낙선했지만 혁명군 장교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1805년부터 퇴역장교들의 모임인 신시내티 소사이어티의 종신 회장을 역임했다.
●번역자 이종권 씨는
서울 상문고와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동대학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와 캔사스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프로 번역가다. 외국어대학교와 경인여대에서 영어 강사를 역임했으며 캔사스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 ‘뉴욕불교’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뉴저지에서 출판사인 프론티어 퍼블리케이션스를 비롯 보림식품, 뉴욕산삼컴패니 등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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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권 /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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