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백악관 성탄절 파티에 나와 함께 참석하신 어머님. 돋보기 안경을 쓰시고 짜깁기로 버신 용돈을 내 손에 쥐어주시며 그 누구 돈도 받지 말라 하시던 어머니다.
# 어머니의 혼절과 업보
(~즐거웠던 그날이 다시 올 수만 있다면/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의 내 심정을 전해 보련만/ 아무리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2005년 고국에서 걸려온 형수님의 전화 한통을 받아 든 내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6년 전 경찰직에서 불명예 사임한 나의 모습을 보시고는 큰아들이 있는 고국으로 떠나셨던 어머니는 가신지 일주일 만에 쓰러지셨고 코마 상태에서 승천하셨다는 소식에 날아갔다.
정신없이 달려 들어간 빈소를 본 순간 혼절 상태로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지… 단 한번만 둘째의 성공한 모습을 보시고 가시지….
“엄마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제발 용서해.” 마치 어린아이 엄마 앞에서 울 듯 영전 앞에서 엉엉 밤새워 울어 보았으나 마음의 죄는 걷혀지지 않았고 뉘우쳐보아도 과거의 업보를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겠다.
# 인생의 쌍곡선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형벌은 무엇일까? 자아의식이다. 인간 이외의 어느 동물도 자의식으로 성찰하고 내면적 세계에 대하여 고찰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관계, 영적 관계 등을 고려하며 행동한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경우 자신의 실수를 주홍 글씨와 같이 달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다. 전과자들이 그렇고 나는 전과자다. 나의 특이한 경력은 한인 최초의 보안관, 최초의 한인 DC 경찰관 그리고 한인 최고위 경찰 간부라는 화려한 수식어 외에도 죄수였다는 과오가 남다르다.
인생에서의 실수는 그 여파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리고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후배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자 했던 내가 어쩌다가 영어의 몸으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악몽이었고 온갖 몸부림으로 헤쳐 나가려 했지만 부질없었다.
단돈 1,000불에 넘어간 양심, 날려버린 명예, 그리고 버려진 약속. 죽고 싶었다. 명예와 불명예가 점철되었던 순간들을 집대성해서 보여주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 1996년 백악관 성탄절 행사
1996년 12월 25일, 우리 가족들이 각자의 손에 작은 카드와 정성 어린 선물들을 들고 스프링필드에 있던 내 집에 모두 모였다. 그해 화창했던 봄날 내 어깨에 경찰 간부 금배지를 달고 승진했다.
성탄 며칠 전 내가 어머니가 사시던 콘도에 정복(Dress Blue)을 차려 입고 경찰차(unmarked vehicle)에서 내리는데 주차장에서 짜집기로 버신 얼마 안 되는 돈을 내 손에 집어 주시며 “애비야, 권력과 돈은 안 바꾼다고 하더라, 항상 조심해라…” 하셨다.
우리 큰아버님은 이 박사 시절 치안감으로 경무대 근무까지 하셨던 분이지만 말로가 안 좋았다. 그래서였는지 그해 어머니를 모시고 백악관에서 개최되었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했었는데 정문에서 경찰간부 배지를 보여주며 어머니와 경비 초소를 가볍게 통과하는 내 모습을 보시던 어머니의 눈빛은 기쁨보다는 우려가 가득하셨다.
백악관 내실의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어머니와 기념 촬영하고 잘생기고 언변 좋은 클린턴 대통령이 연단에 나와서 연설하실 때 어머니는 나를 올려다보시며 “대통령님 참 잘생기셨다…저렇게 멋있으니 가만히 안 놔두지” 하시면서 혹시나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지 걱정하시는 눈치였다.
“참 엄마는 표정이 왜 그래? 좀 웃고 그래봐.” 어머니 이름을 초대 명단에 올리며 힘쓴 내 공적(?)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성탄절 가족 모임은 공과 사에 있어서 내 생애 최고의 성탄절처럼 보였다.
# 영어의 몸이 되다
세상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첩첩 산골 속에서 나는 4개월의 형무소 생활을 했다. 말이 4개월이지 4년 아니 40년 세월을 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이란 상대성이란 것을 처절하게 배웠다. 시베리아로 유배 간 사람처럼 단 한통의 전화도, 단 한편의 편지도 받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떠나기 전 가족회의에서 딸들에게 혹시나 그 누구라도 ‘아빠’ 이야기를 하면 ‘아빠’ 편을 들지 말라고 말하며 연락도 면회도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울먹이는 아이와 전처가 방으로 들어가고 싸늘한 거실에 홀로 있으니 죽음의 묵시록에서나 가능한 정신 이탈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진짜 ‘나’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 홀로 걸어 들어갔던 형무소 생활
가을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질 무렵 혼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간 형무소 정문은 지옥의 문이 따로 없었다. 내가 그렇게도 경멸하며 혈안이 돼서 추적하고 잡아 가두었던 살인, 강간, 강도, 방화, 절도, 사기범들과 같은 한 솥 밥을 먹고 좁은 공간에서 숨쉬며 산다는 것은 지옥이었다. 더군다나 내 과거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 끝장이었다.
다른 막사에서는 젊은 검사 출신 죄수가 복역하고 있었는데 멀건 대낮 운동장에서 수십 차례 칼을(shank) 등에 맞고 요절했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과거 자신들의 추악한 범행을 자랑하는 범죄자들 속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 바로 이전 해에 받아보았던 수많은 연말 카드와 대조적으로 단 한 장의 카드도 못 받았던 그해.
그날 저녁 아무리 잠을 청해도 딱딱한 매트리스만큼이나 내 가슴은 굳어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교도소 벽시계를 보니 자정을 지나 성탄이었다.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가니 정적이 감도는 깊은 숲 속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얼음 고체의 신분으로 떨어져 쌓이는 눈은 저 멀리 철창 울타리 너머에도 바로 눈앞 유리창에도 무심히 쌓였다. 몸에서 내 품는 체온으로 유리창에는 김이 서리고 밖에는 추위에 성애가 피었는데 나는 어찌하다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되었나 하는 자책감에 눈이 뜨거워졌다.
#맨발로 눈보라 속에서 맞이한 성탄
차가운 맨발로 교도관이 있는 감시 타워로 갔다. 성탄이어서 그는 혼자 근무하고 있었다. 잠시 막사 철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내 표정이 너무 절실해서였을까? 그는 거대한 자물쇠를 돌려 철문을 열어 주었다.
가벼운 죄수복 차림 그리고 맨발로 걸어 나온 세상은 백야였다. 고개를 쳐드니 함박눈은 거센 눈보라로 변신해 내 치욕의 육신을 휘감으며 소리쳤다 “너는 천치다!” 그렇게 얼마를 서있었을까, 교도관이 조용히 걸어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Let’s get inside(안으로 들어가자)”
그날 죄수의 몸으로 눈보라 속에서 맞이했던 크리스마스는 내 생애 최악의 성탄절이었다. 하지만 그 성탄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고 또는 최악의 성탄절 모두 의미 있는 것이다. 죽음의 문전에 서있었던 내가 고난을 이겨내고 재생할 수 있었던 사연들은 다음으로 미룬다.
<다음에 계속>
글·사진/ Jeff Ahn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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