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의 이순신 장군 정려.
정려안에 걸려있는 정조가 하사한 글.
12월은 일년을 마감하는 달이고 그중 16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을 승리로 마감하시며 전사하시어 그 치열했던 54년의 일생을 완결한지 422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기도 합니다.
충무공의 공훈은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으니 오늘은 공의 사당인 아산 현충사 초입에 서 있지만 지나쳐 보아 그 담긴 뜻을 바로 알기 어려운 정려(旌閭)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현충사의 정려
정려란 조선시대 왕실이 지정한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하사한 편액(액자)을 걸어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보고 본받도록 지어진 벽이 없는 단층 기와 정자입니다. 현충사의 정려에는 충무공 이외에 공의 조카 이완, 4대손 이홍무, 5대손 이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8대손 효자 이제빈의 편액이 함께 걸려 있어 4충신 1효자의 명문 중의 명문 집안임을 말해줍니다.
왕실이 하사한 편액의 ‘충신’ 이란 나라를 지키는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무장에게 주어지던 가장 영예로운 호칭으로 충무공 가문에서는 5대에 걸쳐 4명의 무장이 나라를 지키다가 전사했다는 뜻이 되니 우리의 마음을 숙연케합니다. 이 정려는 역대 임금 중 충무공을 지극히 사모하여 공의 현창 사업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쳤던 22대 정조 임금이 하사하신 것으로 그 모양과 내용은 사진과 같습니다.
첫 머리를 보면 무인의 최고 영예인 ‘충신’ 이 표시되어 있고, 그 다음 줄의 ‘유명’은 명나라를 높혀 부르는 말이니 명나라의 수군 도독이라는 표시가 됩니다. 충무공의 전사 후 명나라 신종황제는 이순신에게 여덟가지 선물을 보내어 그 공적을 기렸는데 그중에 도독의 공식 인장(도장)인 ‘도독인’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명나라가 왜 충무공에게 그렇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고려말 조선 전기에 걸친 기간의 왜구들이란 좀도둑 해적떼가 아니라 수백척씩 몰려 다니는 조직화된 해적 함대이었으며 섬나라 사람답게 항해술도 능하여 명나라 해안도 이들의 약탈에 골머리를 앓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명이 이순신에 호의를 베푼 이유
더욱이 임진왜란 벽두에 일본이 조선에 ‘명나라를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내어 달라’ 고 공언한 사실을 아는 명나라 로서는 왜군이 곧 자기네의 적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의 선 출병은 순수한 구원병이라 하기보다는 전란의 참화를 조선땅에 가두어 명나라 땅이 전화의 피해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전략적 참전이었던만큼 그들의 전투의지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조선의 무장이 자기네 골칫거리를 일거에 해결 해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또한 이순신 장군과 노량해전까지 함께 싸웠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부임 초기 거만을 떨었으나 이순신의 인품과 작전 능력에 감화되어 이순신 장군에게 ‘조선같은 작은 나라에서 재주를 썩히지 말고 명나라 도독이 되도록 추천 해주겠다’ 고 권고 했다는 설화가 있고, 이순신 전사 후에는 선조 임금에게 이순신을 일러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가 있다’고 극찬한 것으로 보아 이순신의 전공을 자기네 신종 황제에게 적극 주청하였을 것으로 짐작케 합니다.
◆이순신 충절에 감동한 정조는
그 다음의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은 선조임금이 전후에 책봉한 임진왜란 1등 공신의 정식 칭호이며 이어서 이전에 받았던 온갖 작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역대 임금의 이순신 현창을 보면 전사 45년 뒤인 1643년 인조 임금은 무장의 최고 시호인 ‘충무공’을, 64년 후인 1662년 현종 임금은 통영 충렬사에 현판을 하사했고, 전사 108년 후인 1706년 숙종 임금은 충청도 유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산에 현충사를 짓고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했습니다.
약 200년 후 학문의 대왕 정조 임금은 역사 인문연구에 힘쓰던 중 이순신의 충절에 감동하여 왕실 도서관 겸 학문연구소인 규장각(奎章閣)에 명하여 국책 사업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이순신 친필기록을 전국적으로 수집하여 7년 전쟁일기인 ‘난중일기’, 전황보고 및 공문서 철인 ‘장초’, 개인 편지 모음인 ‘서간첩’으로 3분하여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를 편찬 간행하여 그 귀중한 기록이 오늘에 온전히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좌의정에 머물러 있던 충무공의 작위를 최고위 영의정으로 높이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충무공의 묘소에 죽은자의 공덕을 기리는 신도비 비문을 새겨 세워서 오직 충무공만이 임금이 지어 바치는 어제 신도비를 받은 유일한 신하가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당시 궁중 중신들이 임금이 신하의 공덕 신도비를 짓고 세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일제히 반대 하였으나 정조 임금은 ‘이분으로 인하여 없어질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내가 이분을 위하여 비문을 짓지 않고 누구의 것을 지으랴’ 하시며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합니다. 정조 임금은 최고의 이순신 마니아였던 것입니다.
◆직계 3대의 희생의 의미
정조대왕의 학문 연구의 상징이자 민족의 지혜와 역사의 보고이며 이순신 기록의 산실이었던 규장각은 오늘날에는 국립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에 신축 이전되어 귀중하게 보존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현충사 정려의 영예로움 뒤안에는 임진왜란 중 이순신의 백의종군 수난기에 그 어머니 초계 변씨가 아들을 어서 만나보려고 여수로부터 아산 본가로 오시던 배 위에서 객사하셨고, 명량대첩 직후 아산을 보복 공격한 왜군과 맞서 싸우던 셋째아들 면의 죽음까지를 합해보면 이순신의 전사와 더불어 직계 3대가 희생 되었으니 사실상 가문이 희생된 것입니다.
공의 순국일을 맞아 이들 희생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에 답해 우리의 도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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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 이순신 숭모인, V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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