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징주의 시로 유명한 황석우 영역시선 ‘웃음에 잠긴 우주’
▶ 일제시대 反日 시인 중 한 명…영시 70편과 한글 시 30편 실려
황석우 시인의 영역시집 ‘웃음에 잠긴 우주’.
황효영·황명숙씨 부부.
‘창조’ ‘폐허’ ‘장미촌’ ‘백조’ ‘문장’ 등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듣던 1919년-1930년대 사이에 나온 동인집들이다. 책 속에서만 봤던 ‘폐허’의 동인인 황석우 시인(1895-1959)의 작품들이 근 100년 만에 영역시로 재탄생해 책으로 나왔다.
워싱턴에 40여년 넘게 살게 살고 있는 황 선생의 막내 아들 부부인 황효영·황명숙(DC 거주)씨에 의해서다. 저서에는 70여편의 영역시와 책 제목이기도 한 ‘웃음에 잠긴 우주’를 비롯 ‘벽묘의 묘’ ‘사랑의 성모’ ‘나팔꽃’ 등 30편의 한글시가 실려 있다.
황석우 영역시선 ‘Universe Full of Smile(웃음에 잠긴 우주)’은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매년 워싱턴에 다녀간 박이도 경희대 명예교수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지난 주말 신문사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황효영씨는 “우리 가정사는 한마디로 불행했다. 한국전쟁때 형(황원영)이 납북되며 집안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로 인해 부친은 밖으로 떠돌았고, 나는 부친의 정을 못받았고 별로 기억도 없다.
중학교 2학년때인 1959년 납북된 큰형을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 모친(윤덕상)이 미국에 유학와 있던 큰 누나 집으로 떠나 있었기에 청소년기에 가족의 정을 별로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효영씨는 누나와 형에 이어 아버지가 50살넘어 본 늦둥이 막내였지만 형의 납북으로 인해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도 나이를 먹으니,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가신 부친에 대한 연민과 혈육의 정이 느껴졌고 시인으로서의 부친에 관한 이력을 자식과 손주들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몇년 전 DC에서 박이도 교수를 만나 황석우 시선을 번역판으로 출판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서울 중동고 졸업 후 서라벌예대를 거쳐 1975년에 황명숙 씨와 결혼, 76년에 이민 왔다. 누나 집에 먼저 와 계시던 어머니의 초청으로였다. 버지니아 애난데일과 버크에 살며 보험, 부동산 등에 종사하다 DC로 이사, 조지타운에서 세탁업을 하고 있다.
20여년 전에 돌아가실 때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황명숙 씨는 “신여성 이었던 시어머님에게서 시아버님 얘기를 많이 들으며 살았다. 아버님은 로맨티스트 이셨고, 암울한 일제시대의 고뇌하는 지식인 엘리트였다. 그러나 큰 아들 납북 후 가정에 불행이 닥치며 막내아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평생을 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사셨다”고 말했다.
명숙 씨는 “미국에서 자란 우리의 1남 1녀의 아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 하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물었다. 더 늦기 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할아버지가 쓴 시를 읽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영역시선을 본 아이들이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손녀딸은 자신의 학교에 증조부를 소개하며 자랑스러워했다”고 말했다.
딸은 한인 2세 연극배우로 ‘헬렌 헤이즈 어워드’를 수상한 미아 황(메릴랜드 포토맥 거주)씨로 현재 진로를 바꿔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다.
편저자인 박이도 교수는 “1959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황석우 시인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동시대에 함께 동인활동을 했던 김억, 오상순, 김영랑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면 아래로 사라졌었다. 그러나 한국문단에서는 황석우 시인의 시적 위상과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작업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영역을 맡은 조신권 연세대 명예교수는 “황석우는 한국의 1920년대 현대 시사에 큰 공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와 민족혼을 지킨 지사로도 유명하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보성전문 인맥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일제 말기인 40년대에는 강한 탄압 속에서도 조금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민족정신을 끝까지 지킨 저항정신의 체현자였다”고 밝혔다.
황효영씨 부부는 내년 가을, 서울 인사동에서 황석우 시인의 시에 페이퍼 커팅 작가인 윤유미 작가(VA, 매나세스 거주)의 작품이 어우러진 시화전을 계획 중이다.
◆ 황석우 시인은
호는 상아탑(象牙塔). 서울(경성부) 천연동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했다. 1920년 ‘폐허’, 1921년 한국 근대문학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의 창간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에는 국민대학 교수를 지냈다. 1921년 11월 동경에서 원종린, 조용희, 정재달과 함께 문화주의 운동 선전문을 배포하다 검거되기도 했다. 1920년 오상순·남궁 벽·김억·변영로 등과 함께 ‘폐허’를 창간, 그 창간호에 ‘석양은 꺼지다’ ‘망모(亡母)의 영전에 받드는 시’ ·‘벽모(碧毛)의 묘(猫)’ 등의 시 10편 및 상징주의 문학을 소개한 평론 ‘일본시단의 2대 경향’을 발표했다. 1929년에는 그의 유일한 시집인 ‘자연송’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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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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