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는 ‘네순 도르마’(Nessun dorma)일 것이다. 푸치니의 ‘투란도트’ 3막에 나오는 아리아로, 오페라를 떠나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노래다.
아리아는 그토록 유명하지만 오페라 ‘투란도트’는 자주 공연되지 않고, 스토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LA 오페라에서도 2002년에 딱 한번 공연했을 뿐이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옛적 중국에 투란도트라는 공주가 살았다. 누구든 한번 보면 매혹되는 절세미녀, 그러나 차갑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얼음공주’다. 그녀는 청혼하는 모든 남자에게 세가지 수수께끼를 내는데, 이를 풀면 결혼할 수 있지만 풀지 못하면 즉시 처형된다. 그동안 수수께끼에 도전했다가 참수된 청년들의 목이 거리에 숱하게 걸려있다.
어느 날 칼라프라는 왕자가 먼발치에서 투란도트를 보고 홀딱 반해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3개의 문제를 모두 맞춘다. 그러나 당황한 공주는 그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이번에는 칼라프가 공주에게 문제를 낸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기 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을 알아내라는 것. 공주가 이름을 말하면 자신은 기꺼이 죽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공주는 그날 밤 백성과 신하들에게 아무도 잠들지 말고 그의 이름을 알아오라고 명령한다. 알아내지 못하면 모두 죽게 된다는 추상같은 호령이다. 궁전 안팎에서 난리와 소동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칼라프가 달빛 아래 홀로 서서 노래를 부른다. ‘네순 도르마~ 네순 도르마~’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당신도 공주여, 그대의 차가운 침방에서 별을 보시오… 나의 비밀은 내 안에 숨어있고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를 것이오. 아니, 여명이 밝으면 그대 입술에 내가 말해주리다. 그러면 내 입맞춤이 침묵을 녹이고 그대는 내 것이 될 것이오.”
흔히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고 알려진 ‘네순 도르마’는 원래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뜻이다. 가사와 선율이 감미롭고 로맨틱해서 모든 테너 가수들의 애창곡이요, 아마추어 오디션에서도 단골 레퍼토리로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 아리아가 엉뚱한 ‘팬’ 한사람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야기다. 지난 달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행사를 ‘네순 도르마’ 공연으로 폐막했다. 이날 밤 트럼프가 후보지명 수락연설을 한 후 백악관 상공에서는 6분 동안이나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졌고, 바로 이어서 블루룸 발코니에 등장한 테너 크리스토퍼 마키오가 ‘네순 도르마’를 시작으로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 ‘아베 마리아’,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열창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맨 앞줄에 도열한 10여명의 트럼프 일가는 이 공연을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꼼짝 않고 서서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날 클래식 음악매체들과 반 트럼프 언론들은 일제히 성토에 나섰다. “거짓말을 일삼고 여성과 마이노리티를 비하하는 인종주의자 정치인이 진실의 도구인 예술을 캠페인에 이용했다” “중국과 험악한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으면서 중국 공주를 노래한 오페라 아리아에, 중국 발명품인 불꽃놀이를 벌이는 동안 중국에서 온 코로나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예술기금을 대폭 삭감한 정부가 오페라 아리아라니 혐오스럽다” 등등.
트럼프는 2016년 캠페인 때도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른 ‘네순 도르마’를 사용했다가 파바로티 가족으로부터 그의 음악을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파바로티 가족은 고인이 난민보호 유엔평화대사였음을 강조하면서 당시 트럼프의 무슬림 입국금지 조치를 비난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어울리지 않게 이 노래를 왜 좋아할까? 그 이유는 종결부에서 칼라프가 승리를 확신하며 고음으로 노래하는 ‘빈체로, 빈체로!’ 때문이다. ‘빈체로’(vincero)는 ‘나는 이길 것이다’라는 뜻이며 오페라 노랫말은 이렇다. “물러가라 밤이여. 사라져라 별들이여. 새벽이 밝아오면 나 이기리라, 이기리라, 이기리라!” 이 마지막 구절을 트럼프는 대선승리의 찬가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파바로티 외에도 20명의 유명가수들로부터 캠페인에서 노래 사용을 당장 중단하라는 거센 항의를 받았다. 롤링 스톤즈, 톰 페티, R.E.M.은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닐 영은 실제로 지난달 트럼프 캠페인본부를 제소했으며, 건즈앤 로지즈는 트럼프 모형 피냐타를 때려 부수고 그를 모욕하는 티셔츠를 판매했다.
이들 말고도 아델, 에어로스미스, 비틀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튼 존, 레너드 코헨, 린킨 팍, 퀸, 프린스, 리아나 등이 트럼프 선거본부에 자신들의 음악을 쓰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럼프 진영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틀어대고 있단다.
한편, 투란도트 공주는 칼라프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내내 행복하게 살았더란다.
<
정숙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4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행사 마지막에 노래 부르는 순서는 기획이 잘못되었더군. 노래를 부르려면 가볍게 한 곡 정도로 끝내야지 수없이 계속되니 오히려 역효과이다. 그리고 무슨 애국가도 아닌데 왜 모두 부동자세로 서있나? 촌스러웠다. 그나저나 유튜브에서 파바로티가 네순 도르마를 부르는 것을 보니 과연 세계 최고의 테너이었다.
역시 정숙희 위원 칼럼은 읽는 재미도 쏠쏠 하고 새로운 정보도 많네요~ "아무도 잠들지 말고 열씨미 뛰어라" 지지율 역전을 노리는 트럼프가 참모들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정작 본인은 잠자고 싶어도 잠 못 이루고 똥줄만 타겠네.. ㅋㅋ
At Dawn, I will be winning!!!! USA!!!
트트트트트트트....테테테테테테테......ㅉㅉㅉㅉㅉ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