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곡을 수없이 남긴 모차르트는 자신의 묘를 남기지 못했다. ‘음악의 신동’으로 불렸지만 돈이 궁했던 그가 두 대작을 한꺼번에 작곡하는 무리수 끝에 폐렴에 걸려 숨진 뒤 그의 시신은 포대에 넣어져 다른 빈민 폐렴환자들의 사체와 함께 구덩이에 던져졌다. 30여년전에 히트한 명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그 장면을 보면서 비감을 금치 못했었다.
최근 뉴욕주 당국은 코로나 폐렴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무연고자와 신원미상자들의 사체를 뉴욕시 연안 하트 아일랜드에 임시로 집단매장하기 시작했다. 섬을 가로지르는 참호에 희생자들의 관을 두겹으로 쌓아 묻는다. 아마데우스 장면의 데자뷰다. 역사적으로 그 섬의 주요 용도가 집단매장이었다지만 코로나사태의 막장을 보는 것 같아 역시 비감이 들었다.
며칠 전 또 한 차례 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뉴스를 접했다. 미국의 유력 일간신문인 보스턴 글로브지가 지난 19일 일요판에 부고(notice of death)면을 무려 16페이지나 게재했다. 절대 다수가 코로나 희생자들이다. 직전 일요판(12일자)의 부고도 11쪽이었다. 부고가 평일보다 일요판에 대폭 몰리는 이유는 그날이 ‘주일’인데다 주말독자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글로브지의 19일자 부고 면엔 매사추세츠 외에 로드아일랜드·메인·뉴햄프셔 등 인근 주는 물론 캘리포니아·텍사스·플로리다 등 원거리 타주들과 캐나다·오스트리아·그리스·아일랜드·이탈리아 등 외국인 망자들 이름도 눈에 띈다. 매사추세츠 주의 19일 현재 코로나 확진자는 3만8,077명, 사망자는 1,706명이었다. 피해규모가 뉴욕, 뉴저지 주에 이어 전국에서 세번째로 크다.
부고면 확장은 다른 지역의 대소 일간지에서도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엽기현상이다. 뉴와크(뉴저지주)의 스타-레저지는 109명분의 부고를 9페이지에 걸쳐 게재했다. 지난해 같은 무렵엔 고작 1.5페이지에 19명의 부고가 실렸었다. 루이지애나주 지방지인 뉴올리언스 애드버키트 지도 이날 부고면이 8쪽을 넘었다. 이 신문의 일요판 부고면 종전 최고기록은 4쪽이다.
미국 신문의 부고는 대체로 오비처리(obituary, 송덕문) 패턴을 취하고 있다. 원래는 한국식 신문부고처럼 고인과 유가족의 이름 및 장례일정 등을 간략하게 공고했지만 요즘은 고인의 생전 사진을 곁들여 성장과정·가족관계·교육배경·직업(업적)·취미생활·대인관계 등을 깨알같이 기록해 마치 간추린 자서전을 읽는 듯하다. 부고는 내용의 길이에 따라 광고료가 정해진다.
유가족이나 장의사가 쓰는 부고와 달리 오비처리는 커뮤니티의 저명인사나 인기인이 사망할 경우 신문사의 전담기자가 ‘심층취재’를 통해 작성한다. 따라서 오비처리는 특정인을 사후에 평가할 때 다른 곳에선 못 구하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LA 카운티 산하 88개 도시의 지역신문에 게재된 옛날 부고와 오비처리는 카운티 및 해당 도시의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원래 수습기자나 은퇴직전의 퇴물 기자들로 채워졌던 신문사의 오비처리 부서가 요즘 뜨고 있다. 오비처리 전문작가협회(SPOW)라는 국제단체도 있다. 그래미상이 아닌 ‘그리미(Grimmy, 냉혹하다는 뜻)상’을 묘비 모양의 트로피와 함께 매년 우수회원에게 시상한다. 한국일보 미주판도 최근 ‘삶과 추억‘이라는 부정기 오비처리 면을 신설했다. 한국 언론계의 효시이다.
보스턴 글로브지 19일자 일요판의 A섹션은 13페이지에서 28페이지까지가 모두 부고였다. 본보를 포함한 한국 신문들은 부고 하나가 대개 지면의 하단 3분의1을 독차지하지만 글로브지는 매 페이지를 세로로 6칸씩 나누어 한칸에 2~3명분의 부고를 빼곡하게 채워넣었다. 텅 빈 도로, 문 닫은 상가들과 극단적 대조를 이루며 코로나가 바꿔놓은 또 다른 세상을 실감케 했다.
예상 밖의 코로나 때문에 부고가 부쩍 늘어난 것은 역설적이지만 존폐기로의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대다수 신문사들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TV나 온라인 매체들은 누릴 수 없는 특혜이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만 할 일은 아니다. 부고마다 유족의 한숨과 눈물이 담겨져 있다. 모든 신문의 부고면이 정상적인 비즈니스 광고로 대체될 날이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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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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