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에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출장을 갔다. 출장을 떠나며 조안 디디온(Joan Didion)의 에세이집 ‘베들레헴을 향한 느린 걸음(Slouching Toward Bethlehem)’을 집었다. 현재 서안지구에 속해 있는,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인지 그저 제목에 끌려 고른 것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른 채. 그녀의 잔잔하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좋아하는 터였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호텔 방에 혼자 앉아, 커피 머그잔을 손에 들고 진한 커피 향과 함께 그 책을 읽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한 시의 전문이 실려 있었다.
“점점 커지는 나선형 곡선을 만들며 (Turning and turning in the widening gyre)/ 매는 매 부리는 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The falcon cannot hear the falconer;)/ 주변은 무너져 내리고 중심은 버틸 수가 없다 (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 …. 그리고 어떤 거친 짐승이, 마침내 그의 시간에 도달하여, / 베들레헴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탄생을 위해 가는가? (And what rough beast, its hour come round at last,/ Slouches towards Bethlehem to be born?)”
이 시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1919년에 쓴 ‘재림(The Second Coming)’이다. 1차 세계대전 (1914-1918) 직후 또한 아일랜드 독립전쟁 (1919-1921) 시작점인 당시의 분위기를 기독교적 묵시록과 재림의 이미지로 비유적으로 묘사했는데, 부활하신 예수의 다시 오심, 평화의 도래라는 기독교적 재림과는 달리 괴물의 탄생이라는 암울한 암시로 끝난다. 그리고 역사는 그의 시가 암시한 대로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핵폭탄, 전체주의 등등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시가 쓰인 지 백년이 지나 2019년에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으로 전염병이 공격해와 전 세계는 거의 마비 상태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는 현 상황이 1차 세계대전 때와 유사하다고 한다. 전쟁을 준비해 온 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은 산업화된 경제체제를 급습했다. 1914년 6월 범게르만 제국 계승자의 암살로 갑작스레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전쟁이 발발한 후 영국은 금융시장안정과 전쟁을 위해 엄청난 자금을 시장에 풀었다. 현재 COVID-19 사태로 갑작스레 모든 경기가 마비되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내고 있는 것과 같다.
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 미국의 소득은 증가했지만 부는 부유한 자들에게 집중되었고 유럽의 국가들은 전시에 마구 발행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여 경제는 불안정해지고 결국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미국경제에 신뢰를 잃은 투자자들이 대거 주식을 매각하며 대공황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현재 미국은 3월 25일 미국 GDP의 10%에 달하는 2조2천억 달러 코로나바이러스 경기부양책을 내놓은 데 이어, 4월 9일 연방은행에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2조 3천억 달러에 달하는 부실증권구매책을 발표했다.
3월 15일에서 4월 4일까지 1,600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실업수당을 신청했는데, 3월 23일부터 4월 10일까지 미국 증시는 25% 이상이 상승했다. 부의 집중은 가속화되고 많은 이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화되는 현재는 100년 전 1차 대전 후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조안 디디온의 책엔 예이츠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같은 제목의 에세이를 썼는데, 1967년에 쓴 그 에세이는 시의 한 구절, ‘중심은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마약에 찌든 히피족들을 추적하며 쓴 글인데 그녀는 베트남전이 한창인 당시 미국 사회의 붕괴를 그렸다.
부활절에 실시간 방송을 통해 예배를 드리며 예루살렘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무덤과 그곳에서 읽었던 책이 머릿속을 맴돈다. 백합꽃 향이 가득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은 꽃들이 만발한 들에 색색의 부활절 달걀을 찾아 뛰어다니고, 예배가 끝난 후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모여 즐겁게 부활절 식사를 나누던 때가 간절한 추억이 된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탄생한 괴물이 아이들 세대에 덮치게 될까 두려운 가운데 ‘중심을 버티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다. 흐린 하늘, 밤부터는 세찬 비바람이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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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금융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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