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새로운 100년을 맞은 한국영화사상 처음 있는 경사, 한국영화가 할리웃의 높은 장벽을 넘은 기념비적 사건 … 이라고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기생충’은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음으로써 예술성을 인정받은 후 세계 10여개 영화제에서 최고상, 작품상, 각본상 등을 휩쓸었다. 이번에 상업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웃에서 수상함으로써 작품성에 더해 대중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 골든글로브에서 한국영화는 수상은커녕 후보작으로 지명된 것도 처음이다. ‘쾌거’ ‘역사적 사건’이라는 흥분에 찬 표현들은 그럴 만하다.
‘기생충’은 흥행에서도 기록적이다. 세계 전역에서 1억2,800만 달러, 미국에서만 2,300만 달러 이상을 벌어 들였다. 한국에서는 지난여름 일찌감치 관객 1,000만 고지를 돌파했다. 그러니 “이참에 오스카도?”란 기대가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생충’의 이런 인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기본적으로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1990년대 한국사회가 민주화하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규제들이 풀리면서 한국영화는 급성장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영화계로 몰리고, 창의성 넘치는 신선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2004년 ‘올드보이’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후 한국영화는 유럽을 중심으로 꾸준히 주목을 받아왔다.
‘잘 만든 영화’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 상영관을 잡지 못해 관객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불운한 영화, 관객동원에 실패한 영화. 한국 내에서는 흥행작이었지만 한반도 밖에서 관심을 끌지 못한 영화들이 있었다. 저마다의 다양한 ‘장벽’에 막힌 결과였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 5일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막의 장벽’을 이야기했다.
“자막의 장벽을, 그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장벽은 심리적 장벽이다. 매사를 미국기준으로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의식에서 영어 아닌 언어의 영화는 일단 장벽 너머의 것이다. 자막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자막을 읽는 사소한 불편, 비주류 문화에 대한 선입관 혹은 차별의식이 앞을 막아서 웬만하면 장벽 넘는 수고를 하려들지 않는다.
‘기생충’은 기꺼이 그런 수고를 하게 했다는 것이고, 그 동력은 이 시대의 거대한 장벽이 주는 공감대라는 사실에서 아이러니이다. 말기 자본주의가 구축해놓은 만리장성 - 부자와 빈자 사이를 천상과 나락으로 갈라놓고 계층으로 대물림하는 양극화의 장벽이다.
영화는 부유한 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자들의 세상이 단순히 먹고 입고 누리는 것의 호화로움이나 누추함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푸른 하늘과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정원수인 대저택의 삶이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이거나 노상방뇨 하는 자의 오줌줄기인 반지하의 삶이 있다. 시원스럽게 비가 쏟아지면 정원에 티피를 치고 아이가 인디언 놀이를 하는 삶이 있고, 반지하 집안 전체가 물에 잠겨 거대한 시궁창이 되는 삶이 있다. 이쪽에서 저쪽은 아득하게 이어지는 계단들로 분리되고, 그래서 몸에서 풍기는 냄새마저 다른 상층과 하층의 삶으로 격절된다.
‘기생충’의 흥행은 ‘반지하’에서 ‘대저택’으로 옮겨가는 일이, 보통의 월급쟁이들이 수백년 한푼도 안 쓰고 모아야 될까 말까한 일, 계층이동의 통로는 사실상 막혔다는 범세계적 좌절감을 건드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인들의 가장 보편적 공감대가 좌절이라니 이는 비극이다. 지하철요금, 개솔린 가격 같은 사소한 비용 인상이 남미에서, 중동에서 격렬한 시위를 불러일으키는 배경이다.
원인은 경제발전의 과실을 소수의 가진 자들이 독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소득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에 기초한다. 열심히 노동하고, 생산해서 돈을 버는 시대는 지났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자본을 사고파는 기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본주의 말기현상이다.
여기서 또 다른 ‘장벽’이 등장한다. 영화도 예술도 거대자본의 눈에 들어야 발붙일 수 있는 자본의 장벽이다. ‘기생충’의 탄생과 성공에는 제작자·투자자들의 아낌없는 후원이 있었다. 돈이 될 듯하니 돈이 되도록 투자를 한 것이다. ‘자본’의 시각에서 가망성 없는 작품들은 영화관 스크린 앞까지도 나아가지 못한다. 1,000만 관객 영화들은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영화에도 ‘반지하’와 ‘대저택’의 양극화가 엄존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10년 전 그때보다 훨씬 양극화가 심해진 세상, ‘기생충’의 성공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공생의 길은 없는 걸까.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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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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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4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자본의 투자와 흥행의 성사도 달려있겠지만 문화적이 차이에서 극장을 찾는 주류층의 기호 변화로 인해 우리의 정서에 맞는 영화라도 그네들의 관심 밖이고 자막 읽는 자체를 싫어하는 세대에서 작품성을 인정 받기가 힘들지요.
꿈속에서나 할말 하시네요 현실현실을 직시하세요
나도 자본주의가 거의 말기에 이르렀다는데 동의한다. 이세상 모든것은 영원하지않는다. 종교건 정치사상이건 한 기업이건 장시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되지않으면 소멸되는게 우주의 법칙. 문제는 초창기엔 좋은뜻으로 시작된 자본주의가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loop hole 을 악용해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서민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간다는거다. 끓는물에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우리 서민들은 이 사실을 모른채 부자들의 횡포에는 어쩌지못하고 그저 우리 보다 못한 불체자들에 들어가는 혜택에 질투나 부리고있다. 문제는 이 부자들인데…
공부를하든 직장에서 어떤 일 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때는 알아보는 이는 알아 보지요, 요리 조리 요령을 부릴려 농땡이를 칠려 하는걸 보수가 동료가 손님이 보니 자기는 모르는줄 알지만 다른이들의 눈엔 보이게 마련이지만 꼬리가 길면 길수록 밟힐 확률이 올라가 봉급도 제자리 지급도 제자리거나 아예 쫒겨나는 수가 있게 마련 , 당당하게 열심히 남 눈치보지말고 최선을 다할땐 미국에선 적어도 밥은 빌 페이는 할수있지요 하두 제 일 을 제대로 못하고 안하고 게으른 이들이 넘치고 넘처나기 때문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