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가냘픈 자태로 순백하게 빛나는 너, 아침마다 내게 반가운 눈인사를 하네, 날 보고 행복해 하는 너를 보니 나도 정말 행복해. 에델바이스, 나의 조국을 영원히 축복해 주렴.”
팔로알토의 YMCA 로비에서 내가 알기로 지난 18년 동안 처음으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그 마지막 순서로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남녀노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어울려 합창을 하며 10여명 멤버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음악회는 저녁 9시45분에 문을 닫는 수영장과 자쿠지에서 거의 매일 만나 우정 어린 담소를 나누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친구들이 의기투합하여 마련한 모임이었다.
대형보험 브로커리지 회사에서 CPA로 회계업무를 총괄하는 마이크는 20대 초반에 몰몬교 선교사로 도쿄에서 2년간 사역한 적이 있어 ‘오야스미 나사이(돌아가 잘 쉬세요)!’ 같은 기본적인 일본어를 구사한다. 그는 매주 목요일 오후면 팔로알토 비행장에서 개인 세스나 경비행기를 몰고 새크라멘토 너머의 집으로 가 가족들과 지내고는 일요일 밤에 돌아온다.
67세의 백인인 그가 1번 기타를,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백인 제임스가 2번 기타를 맡았다. 제임스는 오른쪽 다리가 관절염으로 심하게 굳어 거의 구부리지를 못한다.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수십년 해온 가드닝 일을 계속하느라 가끔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메일로 나의 신청곡을 미리 접수한 마이크가 이민자들이 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비틀즈의 ‘오블라디 오블라다’ 가사를 친절하게 큰 글자로 인쇄해왔다. 가사를 따라가기가 버거워 혀에서 땀이 났는데, 마지막 노래 에델바이스만은 가사를 보지 않고도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었다.
아는 노래로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한 우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헤어져 달빛어린 밤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에델바이스 노래는 독일인들이 자주 부른다 하여 독일국가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왕왕 잘못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 나치에 대항한 독일 내 저항군들의 찬가였다는 것이다.
해발 1800m에서 백두산보다 높은 3,000m 사이, 산양조차 접근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한 석회암 낭떠러지에 서식한다는 작고 고운 꽃 에델바이스. 19세기 알프스 주민들에게 고결한 매력의 상징이었던 에델바이스는 독일 명칭으로 영어로 번역하면 귀하게 흰 꽃, 노블 화이트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에델바이스 한송이가 나의 낡은 사진첩 속에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이국의 소녀 사진과 함께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사연은 44년 전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국인 친구들과 펜팔 하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막상 영어로 편지 쓴다는 것이 녹록하지 않아서 그리 많은 친구들이 한 것도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신청하니 학생 잡지사에서 주소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독일 여학생 아이리스와 국제 펜팔을 시작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테두리에 빨간색 파란색 무늬가 찍혀 있던 ‘PAR AVION’ 항공우편 봉투를 받아보는 것은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부 아저씨가 손에 쥐어준 독일에서 온 편지봉투를 열어본 나는 짜릿한 전율에 휩싸였다. 하얗게 잘 말린 에델바이스 한송이가 명함크기의 까만 종이에 붙여져 비닐로 잘 포장된 채 펜팔소녀 아이리스의 사진과 함께 온 것이 아닌가. 생애 처음 여학생으로 부터, 그것도 외국에 있는 펜팔친구로 부터 받은 귀한 선물은 까까머리 고딩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 밀려왔다.
나는 답례로 한국고유의 특성이 있는 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끝에 학교 앞 도장포에 가서 목도장을 만들었다. 그녀의 이름을 발음 나는 대로 한글로 새겨 앙증맞은 작은 통의 빨간 인주와 함께 독일로 보냈다. 이후 학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 등 이런 저런 부담과 핑계로 펜팔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내게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에델바이스는 별모양으로 생긴 탓인지 ‘알프스의 별’로도 불리며 지역주민들 사이에서는 사랑을 다짐하는 정표로 건네기도 한다는 온라인 사전의 설명을 보면서 나는 이마를 친다. 아니, 그러면…. 아이리스는 45년 전 내게 사랑의 고백으로 에델바이스를 보내준 것이란 말인가? 멍청이 그것도 몰랐다니…,
나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지금쯤 독일의 어느 곳에선가 우아한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녀에게 ‘건강하고 행복하길 빈다’는 주소 없는 안부편지를 마음으로 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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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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