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실리·펜네 등 짧은 면 이용, 올리브유에 식초·과일즙 넣은 비네그레트 소스와 버무려 오이·토마토 등 채소로 마무리
파스타는 뜨겁게 먹어야 제 맛인 음식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식힌 파스타를 다양한 채소와 함께 먹는 것도 별미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래 봐야 찜통의 온도가 몇 도 내려갔을 뿐이고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쪄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9월이 한 주도 안 남았으니, 더위가 고개를 수그릴 때를 기다리며 여름 식탁에 주로 올라왔던 음식과 식재료를 살펴보자. 오늘은 파스타 차례다. 파스타라면 짜장면처럼 뜨겁게 먹어야 제 맛인 음식 아닌가? 물론 정석을 따지자면 그렇다. 하지만 말려 만든 파스타는 워낙 훌륭한 식재료이다 보니,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어 차갑게 먹어도 맛있어 여름의 식탁에 쓸모가 많은 식재료이다.
◇파스타는 소스 아닌 면 맛뜨겁게 먹든 차갑게 먹든, 파스타를 즐기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될 기본 사항을 살짝 짚고 넘어가자. 첫째, 파스타도 소면 등의 국수류와 마찬가지로 밀가루 음식이다. 다만 세상에 밀의 종류가 한 가지일 수 없으므로 물성이 사뭇 다르다. 우리가 흔히 먹는 밀가루와 달리 파스타는 단단한 듀럼 밀(durum wheat)을 가루 낸 세몰리나(semolina)로 만든다. 당근, 망고, 살구의 색을 책임지는 카로티노이드 성분 덕에 희거나 누렇지 않고 특유의 밝은 노란색을 띤다. 전세계 밀 생산량의 5~8%를 차지할 정도이니 주류는 아니다. 둘째, 단백질 함유량이 높다. 일반 밀가루는 단백질 함유량에 따라 박력(7~9%, 케이크, 부침개용), 중력(9~10%, 일반 다목적), 강력(11~13.5%, 빵용)으로 나뉘고 이름이 의미하듯 반죽이 더 질겨진다. 세몰리나는 단백질 함유량이 12% 안팎이니 강력분 수준이고 반죽도 단단하다.
따라서 셋째, 파스타는 소금간을 하지 않고 만든다. 소금이 밀가루의 단백질인 글루텐을 강화시키므로 빵의 반죽에는 부풀어 오르는 발효에 견디는데 굉장히 중요하지만, 파스타에 더하면 더 딱딱해지므로 세몰리나와 물로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타를 삶는 물에 간을 적극적으로 해줘야 결과물이 밋밋하지 않다. ‘바닷물처럼 짜게’ 간을 한다는 말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1인분 100g 기준 물 1ℓ에 15g 수준이면 충분하다.
넷째, 소스는 항상 면을 기다려야 한다. 면을 먼저 삶으면 배어 나온 전분 탓에 들러 붙어서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어 버리므로 소스를 먼저 만들어 팬에 대기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종류 불문하고 웬만한 파스타는 10분 안팎으로 삶아야 하므로 요리에 일정 수준 능숙하다면 물이 끓고 파스타가 익는 동안 간단한 소스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삶은 파스타는 헹구지 않아야 소스가 잘 달라 붙는다. 애초에 소스가 잘 달라붙도록 주름이 지거나 골이 잡혀 있으니 물에 헹궈서 이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의외로 여러 원칙이 따라 붙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파스타는 소스가 아닌 면 맛으로 먹는 음식이다. 한 가닥씩 찬찬히 씹어 보면 알 수 있다. 또렷한 고소함이 입 안 전체에 퍼지면서 굉장히 만족스럽다.
파스타를 차갑게 식히려면 삶아서 물기를 뺀 뒤 올리브기름을 넉넉하게 끼얹어 서로 붙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차가운 파스타를 먹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첫째, 따뜻한 파스타의 원칙을 준수해 그대로 식힌다. 다만 면이 서로 붙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건져 물기를 완전히 뺀 파스타를 넉넉한 크기의 볼에 담고 올리브기름을 넉넉하게 끼얹어 버무린 뒤 그대로 상온까지 식힌다. 기다려야 한다는 게 단점이지만 미리 기름에 버무려 놓았으니 산으로 신맛만 더해 마무리하면 끝이다. 두 번째 방법은 일반 밀가루 면처럼 물을 부어 온도를 내리는 동시에 전분도 씻어내는 것이다.
여태껏 전분을 안 씻어 내는 게 파스타의 기본 가운데 하나라고 했으니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는 것 아닐까? 마음 먹기에 달렸다. 어차피 차게 먹을 파스타이니 삶자 마자 차게 식혀주는 게 최선일 수 있다. 또한 올리브기름이 파스타를 비롯한 식재료 전체와 양념을 한데 아울러 주는 역할을 맡으므로 전분을 헹궈내더라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무엇보다 식히는 시간을 줄이면 파스타가 놀라울 만큼 효율적인 간편식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따뜻한 파스타 가운데서도 마늘과 올리브기름으로만 만드는 알리오올리오 같은 것은 소스가 워낙 간단하니 라면 끓이는 노력에 조금만 품을 더하면 만들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차가운 파스타는 불을 써 소스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 어떻게 만들더라도 면을 삶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시작해서 10~15분이면 먹을 수 있다. 더군다나 삶은 면을 헹군다면 소스와 바로 만날 필요도 없으므로 마음의 여유도 좀 더 있다. 전분 탓에 달라 붙을 수는 있지만 단단해 파스타는 잘 불지 않으니 밥을 짓기 귀찮을 때 넉넉하게 서너 끼 분량을 만들어 두고 먹기에도 좋다.
◇짧은 파스타에 소스는 드레싱으로기본을 다 살펴 보았으니 본격적으로 여름 파스타를 만들어 보자. 당연하게도 일단 파스타부터 골라야 한다. 정석을 어기고 삶은 파스타를 물에 헹궈서 만드니 약간 무규칙 이종 격투기처럼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공정한 경기 운영을 위해 최소한의 규칙 혹은 가이드라인은 있다. 일단 스파게티나 링귀니처럼 긴 면보다는 푸실리, 마카로니, 파르팔레(나비넥타이 모양), 펜네 등 짧은 파스타가 차갑게 먹기에는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짧으니 다루기 편하고, 삶아 헹군 뒤에도 다른 재료와 잘 어우러질뿐더러 포크 아닌 숟가락으로 퍼먹기에도 편하다. 한편 짧다 못해 아예 곡물을 닮은 오르조(장립종 쌀알 모양)나 모로코의 전통 음식인 쿠스쿠스(조 알갱이 모양)를 쓰면 씹히는 맛이 사뭇 다른, 밥 같은 느낌이 살짝 풍기는 파스타가 된다. 마지막으로 둥근 귀 모양인 오레키에테 같은 파스타도 있다. 모두 마트부터 백화점, 인터넷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다.
짧다 못해 아예 곡물 같은 오르조나 모로코의 전통 음식인 쿠스쿠스를 쓰면 밥 같은 느낌의 파스타가 된다.
다음은 소스 차례이다. 여름 파스타는 차갑게 먹으므로 굳는 지방은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계란 노른자와 베이컨기름으로 만드는 카르보나라 파스타라면 버무리자마자 뜨거운 상태에서 먹어야 제맛을 감상할 수 있다.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하는 순간 느끼해지고 완전히 식으면 괴식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파스타는 차게 먹는다고 해도 굳은 지방 탓에 무거우므로 여름과 티끌만큼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신맛을 지닌 과일즙이나 식초에 올리브기름을 바탕으로 만든 비네그레트 류의 드레싱이 가장 무난하다. 산과 기름을 1:2~3의 비율로 볼에 담고 소금과 후추로 간한 뒤 마늘과 샬롯을 더한 뒤 거품기로 휘저어 걸쭉하게 유화시켜주면 끝이다. 파스타에 끼얹어 스패출라(고무주걱)로 뒤적여 골고루 버무려 준다. 레몬과 라임즙, 각종 식초류는 기본이고 여름이라면 생토마토 속의 즙을 짜내 비네그레트를 만들어도 좋다(박스 참고).
◇한끼 요리로 품격 높이려면이렇게 파스타의 ‘몸통’이 완성되었는데, 이것만 먹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지만 하나의 완결된 끼니라는 느낌은 주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저런 부재료를 적절히 더해주는 게 바람직하다. 생각할 수 있는 웬만한 것들은 다 그럭저럭 자기 자리를 꿰어 찰 수 있으니, 파스타를 중심에 두고 맛과 질감의 두 측면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을 감안해 더한다. 고기는 굳이 초대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없으면 끼니를 못 먹겠다면 삶아 차갑게 식힌 닭가슴살이 놀랍게도 아주 잘 어울린다. 고기의 부재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 수준으로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아보카도를 깍뚝 썰어 더하면 지방의 풍성함을 깔아줘 만족감이 높아진다.
말랑거리는 치즈도 아보카도와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브리나 카망베르처럼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종류부터 리코타나 코티지처럼 뭉쳐 있지도 않고 숙성도 안 시킨 치즈를 드문드문 떼거나 떠서 버무린 파스타에 올려준다. 한편 빠지면 섭섭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같은 단단한 치즈는 뜨거운 파스타와 마찬가지로 마무리에 갈아 뿌려준다. ‘치즈의 왕’이라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가 비싸거나 없다면 대체품으로 그라나 파다노를 쓸 수 있고, 사실은 체다처럼 흔한 치즈를 써도 안 쓰는 것보다는 훨씬 맛있다.
다음은 차가운 파스타에서 가장 중요한 부재료인 채소이다. 오이, 셀러리, 토마토부터 파프리카, 깍지콩, (통조림) 옥수수까지 대부분의 채소는 생으로 써 아삭함과 신선함을 보태는 가운데, 부드러움과 풍성함을 더해주는 예외가 있으니 바로 가지이다. 길이 반대 방향으로 1㎝안팎의 두께로 넉넉하게 썰어 종이행주를 깐 접시 위에 올리고 소금을 솔솔 뿌린 뒤 다시 종이행주를 한 켜 올리고 접시로 덮어 누른다. 전자레인지에 10분 돌리면 조직의 공기가 빠져 나간 상태로 익는 한편 파스타의 소스도 적절히 흡수해 다른 채소와 질감의 대조를 이루며 맛의 다양성에 공헌한다.
마지막으로 올리브와 허브가 있다. 올리브는 채소이지만 기름지고 소금물에 담가 가공해 강한 짠맛을 지녔으므로 조커로 활용할 수 있다. 입자의 크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으니 곱게 다져 소스에 더하면 파스타 전체의 맛이 확 밝아지고, 굵게 썰어 다른 채소처럼 버무리면 중간중간 아삭하게 씹히며 고소함과 짠맛의 악센트를 준다. 향이 음식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허브야 말로 어쩌면 치즈보다도 더 빠지면 섭섭한 재료인데, 토마토와 더불어 이탈리아 국기의 색깔 가운데 하나로 두루 쓰이는 바질은 기본이고, 기본보다 응용이 좋으며 모험심도 갖춘 맛의 고수라면 고수를 권한다.
5분이면 뚝딱, 생토마토 파스타10분 안팎이면 한 그릇 뚝딱 나오는 여름 파스타마저 만들 여유도 없다면? 그 절반의 시간이면 만들 수 있는, 더 빠른 파스타가 있다. 핵심은 2분이면 익는, 세면과 비슷한 굵기인 에인젤 헤어(카펠리니)이다. 일단 파스타 삶을 물을 올리고, 끓는 동안 토마토를 준비한다. 토마토를 씻어 길이 반대방향으로 넓적하게 썬다. 부드러운 속살에 비해 껍질이 다소 질긴 토마토는 아무거나 잘 드는 식칼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가 깔쭉깔쭉한 스테이크 나이프나 빵칼로 써는 게 뭉개지지 않아 좋다. 썬 토마토를 두어 쪽씩 겹쳐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깍뚝 썬 뒤 샐러드볼에 담고 소금을 한 자밤 쯤 솔솔 뿌려 둔다. 채소를 비롯한 다른 부재료도 원하는 대로 썰어 더해 버무려 둔다. 면이 익으면 체로 받치고 찬물로 헹군 뒤 남은 물기를 최대한 털어내 토마토를 비롯한 채소에 더한다. 올리브기름을 양껏 끼얹은 뒤 포크나 젓가락으로 잘 버무려 먹는다. 아무래도 긴 면이다 보니 부재료와 유연하게 잘 섞이지는 않지만 그런 단점을 감수하고 만들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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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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