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치면 사람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마치 피아노가 나에게 속삭이는 거 같지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더 재미있고, 특히 마음이 어려울 때 많은 위로가 된답니다.”
LA 한인타운에서 미술용품 전문점을 운영하는 조애나 박(68)씨는 요즘 사람만 보면 붙들고 피아노 예찬론을 편다. 그녀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약 1년 전부터. 더 이상 인생에 큰 낙이나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던 어느 날 ‘나는 뭘 좋아하나?’를 생각했다고 한다.
“양로원에 드러눕게 됐을 때 내가 인생에서 못해봐서 가장 속상하고 억울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음악이었어요.” 그걸 깨달은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가까운 피아노학원에 등록했다. 첫날부터 푹 빠져서 아침에 가게 열기 전에 레슨 받고, 가게 닫은 후에 가서 연습하고, 일요일 교회 갔다 와서 또 치고, 틈만 나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기쁘고 감사하다는 그는 피아노 말고 첼로연주와 합창단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숙희(67)씨는 일주일에 3일 미술공부를 한다. 수요일은 한미여성회(KAWA)에서 모던아트 강의를, 목요일엔 직접 작품을 만드는 스튜디오 클래스를, 금요일엔 시메이 갤러리에서 현대미술사 강의를 듣고 있다.
“11년전 은퇴했을 때부터 이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싶은 허기가 있었어요. 자극이 없으면 발전도 없잖아요. 하나씩 배울 때마다 저 뒤에는 뭐가 있지? 저 옆에는 뭐가 있지? 하면서 삶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거, 벅차지만 재미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더 크게 열리는 거 같아요.”
인생의 후반기에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삶이 활짝 피어나는 여성들을 주변에서 자주 본다. 노인이라기엔 너무 건강하고 활기찬 그녀들은 바삐 살던 젊은 시절에는 돌아보지 못하고 채우지 못했던 삶의 욕구와 호기심을 더 이상 눌러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시간과 형편의 여유가 허락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이민사회의 연륜이 깊어진 덕분일 것이다. 수십년전 이민 와서 허리띠 졸라매고 일만 했던 사람들이 은퇴하고 숨을 좀 쉬게 되면서 아름다운 것, 의미있는 삶, 재미있는 활동을 찾아 나서고 있다. 과거에는 많지 않았던 각종 취미동호회를 한인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처음 아트클래스를 연 곳은 시메이 갤러리(구 앤드류샤이어 갤러리)였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예술 전반에 걸친 강의를 계속해온 메이 정 관장은 날이 갈수록 학생들의 지식욕구가 뜨겁게 달아오른다고 말한다.
“아트클래스는 숨구멍이자 도피처에요. 일하는 여성들은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딴 세상의 숨을 쉬러 오고, 주부들은 뒤늦게 피어오른 지식 욕구를 채우기 위해 찾아오지요. 다들 얼마나 진지하고 열성적인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지만 하지 않는다. 음악, 미술, 문학, 영화, 역사 등 예술은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장르를 섭렵하며 더 깊고 넓게 인문학의 숲을 산책한다.
타운에서 보석상을 하는 메이 김(56)씨는 아트클래스, 동문회 강좌, 와인 모임, 전시와 공연들을 누구보다 열심히 찾아다니는 아트 러버다. 그녀에게 인생은 아름다운 순간들로 직조된 예술작품이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예술의 경험들이 인생의 주인공이고, 일상과 비즈니스는 이런 순간들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죠. 순간과 순간을 인조이할 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광고회사 등 2개 업체를 운영하는 크리스티나 정(55)씨는 매주 금요일 미술사 강의를 듣고, 한달에 하루는 도자기 스튜디오에서 4시간 이상 흙을 만지며 물레를 돌린다. 그는 애들이 어리고 비즈니스가 바빴던 젊은 시절부터 일부러 시간을 내서 아트 공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 애들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들 부담 안주고 엄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심어주려고, 엄마가 재미있게 잘 사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어요.”
동기와 목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이 말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과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경험들’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고 경험하며 감각을 벼린다. 그리고 배움은 나이에 관계없이 삶에 변화를 불러온다.
예술은 내가 누구인가를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그림 그리고 피아노 치고, 음악회와 전시회 가는 거, 모두 적극적인 행동이고 훈련이며 정신을 써야하는 일이다. 정신만 쓰는 게 아니라 돈도 쓰고 시간도 써야하니 예술은 고급 취미다. 비싸서 고급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의식적으로 고양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깨어있는 노년은 언제나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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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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