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일본의 야스지로 오주(1903-63)다. 그의 영화는 화장을 안 한 여인의 소박한 아름다움과도 같다. 오주의 영화를 보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품고 있는 저력을 느끼게 된다.
오주는 가족얘기를 자주 다루었다. 특히 ‘늦봄’에서처럼 자기를 돌보느라 혼기를 놓친 딸을 뒤 늦게 시집보내고 혼자 쓸쓸히 외로움을 반추하는 홀아비 아버지의 얘기와 같은 가족의 해체를 종종 만들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 그 쓸쓸함이 가슴을 사무치게 파고든다. 그러나 오주의 영화는 체념적인 기운 안에서도 결코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가 감독 초창기 넌센스 코미디를 만들던 솜씨가 후반기 작품들에서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오주의 영화는 매우 개인적이요 또 일본적이나 그 것은 또한 보편적인 것이어서 특히 같은 동양인인 내겐 마치 이웃의 얘기와도 같다. 그의 영화를 보면 서두르지 않고 담담하고 자상하게 애잔함과 유머를 고루 섞어 삶의 예지와 인연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보여줘 평화감과 함께 미열과도 같은 희열을 느끼게 된다.
오주는 삶의 예술가요 서민의 시인이다. 그의 영상은 군더더기 없는 검소한 정수로 직조돼 미니말리스트들인 로베르 브레송과 칼 드라이어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오주는 와이드 스크린을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 같다’면서 기피했고 칼라도 뒤 늦게 썼다.
그의 카메라는 앉은뱅이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 앉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그래서 오주의 영화에서는 다다미 위를 왔다 갔다 하는 맨발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는 영화의 기술적 언어를 칼부림 하듯 구사한 아키라 구로사와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던 사람으로 ‘적을수록 많다’는 것을 증거 한 사람이다. 오주는 매우 보수적이요 일본적이어서 구로사와와는 달리 사후에야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오주는 1927년 무성영화 ‘속죄의 검’으로 데뷔해 사망하기 일 년 전의 ‘가을 오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영화에는 계절이름이 자주 나온다. ‘늦봄’ ‘초여름’ ‘이른 봄’ ‘늦가을’ 및 ‘가을 오후’들처럼 서로 혼동하기 쉬운 영화들에서 치슈 류와 세추코 하라 그리고 치에코 히가시야마 등과 같은 자기 단골배우들을 써가며 서로 비슷비슷한 가족의 얘기를 그려 때론 어느 영화가 어느 영화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 가고 회사에 출근하고 저녁에 귀가해 밥 먹고 얘기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이다. 그는 이런 일상적인 틀 안에서 세대차와 가족의 사망과 실직 그리고 부부간 갈등과 결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얘기들을 거의 반 극적으로 천천히 들려주고 있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와 함께 고즈넉한 배경 음악을 등에 업고 침묵하는 낮은 카메라가 다다미방과 통근 열차와 조는 것 같은 정원과 빨랫줄에 널린 빨래 및 밥상 등 평범한 사물들과 풍경의 미세한 것까지도 포착하면서 영화는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적 힘을 발산한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다.
서민들의 일상의 품위를 높여준 오주의 영화는 인간들의 실수와 과오를 넉넉히 용서하면서 삶의 문제들을 체념에 가까운 수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좇는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를 수용할 줄 아는 자세는 오주의 최고걸작이라 평가 받는 ‘도쿄 스토리’(Tokyo Story^1953)의 마지막 장면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딸 교코가 미망인 올케 노리코에게 “인생이란 실망스런 것이지요”라고 묻자 노리코가 “네, 그래요”라며 대답한다.
‘도쿄 스토리’는 시골서 도쿄로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을 보러온 노부부가 자신들을 짐스럽게 여기는 자식들에게 실망하고 귀향하는 얘기. 노부부를 잘 모시는 사람이 미망인 며느리 노리코. 가족을 하나로 묶는 감정의 풍성한 실타래를 풀어헤친 감동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가 20일(하오 1시) 산타모니카의 Aero극장(1328 Montana Ave.)에서 상영된다.
오주의 ‘오차즈케의 맛’(The Flavor of Green Tea over Rice^1952^사진)도 가족 얘기다. 도쿄 중상류층의 부부 모키치와 다에코의 서서히 시들어져가는 관계를 다루면서 결혼과 함께 부부간의 여러 문제점들을 잔잔한 유머와 함께 명철하게 관찰하고 있다. 여기에 다에코의 신세대 여성인 질녀가 중매결혼을 결사반대 하면서 영화에 신풍을 불어 넣는다. 또 영화는 전쟁의 아픈 후유증도 담담히 토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후 도쿄의 거리와 파칭코장과 라면집 그리고 야구장과 자전거경기장 등을 찍은 촬영도 좋다. 제목은 모키치가 좋아하는 녹차에 말은 밥. 그는 이 보통 음식을 결혼에 비유한다. 이 영화가 27일 Criterion에 의해 DVD로 나온다.
오주는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얘기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으며 인물과 상황과 풍경을 가까이서 정성껏 관찰하면 이들이 절로 인생의 신비한 희로애락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
박흥진 편집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1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이런 영화를 보려면 NetFlix로가면 되나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