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추의 단맛과 어울리고 쌉쌀한 맛도 잡아줘...김치 양념으로 제격에 맞아
▶ 불에 그을려 껍질 벗긴 과육은 된장에 무쳐 밥 반찬하거나 올리브기름 채워 병조림으로
파프리카로 김치도 담글 수 있을 정도로 파프리카는 다양한 식재료와 잘 어울리는 식감과 맛을 가지고 있다.
불로 구운 파프리카에 올리브기름과 식초 등을 넣어 버무리면 샐러드가 완성된다.
속을 비워 살짝 데친 파프리카 안에 간 고기와 토마토, 밥 등을 넣어 채우면 맛뿐 아니라 모양도 예쁘게 잡을 수 있다.
불에 그을린 파프리카를 2~8등분 한 뒤 마늘을 넣고 끓인 올리브 기름에 재우면 병조림이 된다.
파프리카는 윗둥과 아랫둥을 자르고 성냥개비와 비슷하게 썰어서 손질한다.
파프리카를 불에 직접 그을리면 껍질도 잘 벗겨지고 ‘불맛’도 밴다.
파프리카는 엄밀히 따지면 스위트(혹은 벨) 페퍼를 말려 낸 가루를 말한다.
바로 며칠 전, 귀가 솔깃해지는 김치 뉴스 하나를 들었다. 파프리카로 담근 김치가 품평회에서 ‘올해의 김치’로 뽑혔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현존하는 모든 채소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다. 순무와 맛이 비슷한 콜라비, 토마토, 심지어는 귤도 김치로 탈바꿈한다. 그렇다면 파프리카를 김치에 쓰지 못할 이유가 있나. 그리하여 파프리카를 넣고 김치를 담갔다. 뉴스에 의하면 포기김치가 올해의 김치로 선정되었으나 이다지도 꿉꿉한 날씨라면 국수를 말아 먹기 좋도록 국물 자작한 열무김치를 만들어도 어울릴 것이다. 파프리카는 맵지 않으며 단맛이 꽤 두드러지는 데다가 끝에서 신맛도 살짝 돈다. 따라서 배추나 무를 비롯한 김칫거리의 단맛과 잘 어울리고, 쌉쌀한 맛도 잡아 준다. 또한 아삭거리는 질감이 꽤 유쾌해서 양념으로 제 몫을 잘 한다. 열무대와도 식감이 잘 어우러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파프리카 껍질 손질법파프리카를 기존의 김치 재료들 사이에 슬쩍 자리 잡아 주려면 어떻게 손질해야 할까. 쪽파나 양파처럼 폭이 좁으면서 길게, 말하자면 성냥개비와 비슷하게 썰어 주면 된다. 잘 씻은 뒤 최대한 균일하게 모양을 잡아 썰 수 있도록 윗동과 아랫동을 썰어낸다(썰어낸 부분은 볶음 같은 다른 조리에 쓴다고 늘 마음을 굳게 먹지만 대체로 칼질을 하면서 집어 먹게 된다). 씨를 통째로 발라내고 세로로 썰면 파프리카가 평평하게 펼쳐진다. 바깥쪽이 도마에 닿도록 올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흰 부분을 칼날을 수평으로 눕혀 가볍게 발라낸다. 이제 그대로 착착, 길이대로 썰면 셀로판질의 질긴 껍질에 크게 방해받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파프리카 면의 질감 차이는 사뭇 두드러진다. 미심쩍다면 껍질이 위를 보도록 도마에 올려 썰어 보자. 일단 질긴 껍질부터 공략하느라 칼에 힘이 많이 들어가니 은근히 가지런히 썰기가 어려워지고, 또한 잘린 면도 고르지 않다. 다시 뒤집어 썰어 보면 지금까지의 칼질이 사뿐사뿐, 꽤 가벼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사실 껍질이 중요하기는 중요하다. 파프리카 전체의 구조를 지탱해 주므로 껍질을 어떻게 손질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통하고 둥근 모양이 종을 닮았다고 해서 파프리카는 벨 페퍼(Bell Pepper), 혹은 단맛이 두드러져 스위트 페퍼(Sweet Pepper)라 일컫는다. 녹색과 빨간색이 양대 색상인데 청고추가 더 익으면 홍고추가 되듯, 파프리카도 녹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뀐다. 그 밖에 품종에 따라 오렌지색, 아주 연한 연두색, 가지와 흡사한 보라색을 띠는 것들도 있다. 맛에는 두드러지는 차이가 없지만 보기만 해도 예쁜 색깔인지라 샐러드 등에 섞어 쓰면 나름의 재미가 있다. 한편 밑면을 확인해 몸통이 세 갈래인 것을 수놈, 네 갈래인 것을 암놈으로 구분하며, 후자가 요리에 더 좋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낭설이며 파프리카는 성별이 없다. 마지막으로 토마토처럼 과일 같은 열매이지만 채소로 분류한다.
요즘은 ‘핵’이라는 신종 접두사를 달고 나오는 매운 음식이 대유행이라 청양고추가 대세가 되고 풋고추조차 매워졌다. 그렇지만 파프리카야말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고추이다. 근거가 있는 얘기다. 매운맛에도 지표가 있기 때문이다. 스코빌 척도(Scoville Heat UnitㆍSHU)다. 1912년 미국의 화학자 윌버 스코빌(Wilbur Scoville)이 최초로 개발해 이름 붙였는데, 매운맛을 느낄 수 없는 단계까지 캡사이신을 희석시켰을 때의 물 비율을 수치로 삼는다. 요즘은 고성능 액체 크로마토그래피(HPLC)로 캡사이신의 농도를 직접 측정한다. ‘토종의 자존심’ 청양고추(사실은 태국 고추와 교배종)는 2,500~8,000SHU 또는 4,000~1만2,000SHU로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칼칼한 매운맛을 내는 할라페뇨와 같은 급이다. 참고로 순수한 캡사이신액은 1,500만~1,600만SHU이며, 요즘 대세인 매운맛 라면 가운데 가장 센 것이 8,000대 후반에서 9,000대 중반 사이다. 그런 가운데 피망의 SHU는 0으로 무해하다. 와삭, 한 입 경쾌하게 베어 물고 난 뒤 닥쳐 오는 매운맛의 후폭풍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
파프리카는 껍질을 살리면 다른 식재료의 껍데기 혹은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둥근 애호박이나 단호박과 비슷한 원리이지만 속살을 파낼 필요가 없다. 준비는 두 단계인데, 일단 꼭지가 달린 윗부분만 길이로 썰 때와 같은 요령으로 따내 씨를 들어내고 칼 끝으로 흰 부분을 긁어 떼어낸다. 그리고 끓는 소금물에 2~3분 데쳤다가 뒤집어 종이 행주에 올려 식히면서 물기를 뺀다.
이렇게 밑준비를 마친 피망 그릇은 어떤 식재료로 채우면 좋을까. 피자와 동그랑땡의 중간 어딘가를 목표로 삼아 간 고기와 토마토에 치즈를 더해 모든 재료를 한데 버무려 마무리한다. 중불에 기름을 둘러 달군 팬에 양파와 마늘을 먼저, 간 고기(돼지고기도 상관 없지만 쇠고기가 조금 더 잘 어울린다)를 나중에 더해 붉은 기가 가실 정도로 볶는다. 대접에 옮겨 한 김 날린 뒤 모차렐라를 비롯해 잘 녹는 치즈와 썬 쪽파 등을 섞은 뒤 파프리카에 채워 180℃로 데운 오븐에 25~30분 굽는다. 치즈를 조금 남겨 두었다가 속을 채운 파프리카 위에 얹어 구우면 한결 맛있다. 밥이 있다면 다른 재료에 슬쩍 섞어 채워도 좋다.
이 외에도 길이 방향으로 반 갈라 간 고기, 두부 등으로 만든 동그랑땡의 재료를 채워 고추전처럼 지져 먹을 수 있는데, 파프리카의 살이 일반 고추보다 두 배는 두꺼우니 프라이팬에서는 시간을 많이 잡아 먹으면서도 제대로 익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파프리카는 양식 오븐 구이처럼 끓는 소금물에 한 번 데쳤다가 오븐에 구울 것을 권한다.
불에 구우면 잠재력 폭발껍질을 벗겨 낸 파프리카의 과육은 매끈함과 부드러움이 돋보인다. 직화에 파프리카를 올려 보자. 가정이라면 가스레인지에 그대로 올리는데, 둥글둥글해서 불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으므로 석쇠를 받치는 것도 좋다. 직화에 올리면 전체가 타 버릴 것 같지만 껍질의 버티는 힘이 의외로 센지라 자신은 까맣게 타더라도 과육은 보호한다. 따라서 파프리카의 겉면이 고르게 시커매질 때까지 가스 불에 그을린다. 파프리카 한두 개의 껍질을 벗기는 데 가스 불을 활활 피우다니 왠지 빈대 잡느라 초가삼간 태우는 느낌이 든다면 가스캔을 끼워 쓰는 토치를 쓰는 것도 좋다. 다만 불꽃이 좁은 영역에 집중적으로 영향을 미치므로 진짜로 속살까지 태우지 않도록 파프리카를 고루 움직여가며 그을려야 한다. 뜨거우므로 파프리카는 집게로 다룬다.
전체를 고르게 그을려 파프리카가 시커멓게 되다 못해 껍질이 드문드문 벗겨지기 시작하면 종이 봉투에 담아 주둥이를 잘 여며 20분가량 그대로 둔다. 남은 열이 빼앗는 파프리카의 수분이 수증기가 되어 살짝 삶아 주는 효과를 내니 그을린 껍질 대부분이 과육에서 절로 떨어져 나간다. 10분이 지나고도 껍질이 붙어 있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물로 한 번 씻어 줘야 하는데, 이때 엄지 손가락으로 표면을 가볍게 문질러 주면 나머지도 다 떨어져 나간다. 직화와 수증기로 인해 과육이 익어 부드러워졌으므로 꼭지를 손가락으로 당기면 씨도 함께 딸려 떨어진다. 껍질도 꼭지도 씨도 떠나고 과육만 남은 파프리카를 종이 행주 위에 올려 물기를 걷어 낸다.
껍질을 벗겨 내는 것으로 조리의 75%쯤을 마친 셈이라 어떻게든 먹어도 좋다. 직화에 그을렸기 때문에 소위 ‘불맛’이 배어 있다. 조금 과감한 듯한 양념도 잘 어울린다. 껍질째 김치에도 넣어 먹을 수 있는데 나물도 가능하다. 풋고추나 오이고추처럼 된장에 무치면 여름 밥 반찬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특히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을 정도인 우리의 고추 사랑을 응용하여 풋고추부터 홍고추, 청양고추 등을 취향에 따라 송송 썰어 함께 무치면 더욱 맛있다.
양식도 크게 손이 가지 않는다. 올리브 기름과 식초를 3:1 비율로 섞어 만든 비네그레트에 버무리면 여러 갈래로 응용할 수 있는 샐러드의 기본이 된다. 양파와 마늘 같은 향신채를 필두로 오이나 토마토, 가지 같은 채소, 올리브, 염소젖과 양젖으로 만든 페타 치즈, 안초비 등의 맛내기 재료를 있는 대로 더하면 표정이 각기 조금씩 다른 지중해풍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샌드위치에 끼우면 제 몫을 톡톡히 한다. 한편 이왕 그을리는 김에 한두 개 이상의 파프리카를 손질한다면 두고 먹을 수 있는 병조림도 만들 수 있다. 올리브 기름에 마늘을 더해 맛과 향이 배어들도록 은근히 끓인 뒤 완전히 식힌다. 그사이 파프리카를 그을려 껍질을 벗겨내고 길이 방향으로 2~8등분 한다. 썬 파프리카를 소금과 식초에 차례대로 버무린 뒤 끓는 물 등으로 살균한 병조림용 ‘메이슨 자(Mason Jar)’에 차곡차곡 담는다. 병의 바닥에 식초를 조금 깔고 마늘과 올리브 기름을 채운다. 밀봉하면 냉장고에 1년 동안 두고 먹을 수 있다.
피망? 파프리카? 벨 페퍼?통틀어 파프리카라 다뤘지만 맵지 않은 이 고추의 이름 세계는 다소 복잡하다.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파프리카를 ‘피망’이라 불러 왔다. 포르투갈어 ‘pimentao’를 일본에서 음차한 ‘ピ-マン’이 건너온 것이다. 파프리카는 엄밀히 따지자면 스위트 페퍼나 벨 페퍼를 말려 낸 가루를 일컫는 명칭이다. 정리하자면 생채소는 ‘스위트(혹은 벨) 페퍼’, 말려서 가루를 내면 ‘파프리카’라는 말이다. 이야기를 꺼낸 김에 보충하자면 가루 파프리카는 매운맛을 지닌 고추로 만드는 경우도 있으니 단맛과 향만을 원한다면 ‘스위트 파프리카’라 이름 붙은 것을 고른다. 생파프리카의 껍질을 벗기고자 불에 그을렸을 때 ‘불맛’이 배는 것과 흡사하게 연기를 쏘여 말리면서 향을 한 켜 더 입힌 뒤 가루를 낸다. 스위트 파프리카는 이름처럼 단맛이 꽤 두드러지니 육개장을 끓일 때 한국 고춧가루의 균형을 잡아 준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더하면 맛이 좀 더 다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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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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