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내가 중학생 때 서울 남영동에 있던 성남극장에서 본 히치콕의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에서 도리스 데이(사진)가 부르는 노래 ‘케이 세라, 세라’를 들으면서 노래가 참 좋구나하고 감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데이가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내로 나온 이 영화는 스릴러의 거장 히치콕의 영화치곤 타작이다.
노래의 원제는 ‘왓에버 윌 비, 윌 비’이지만 ‘세상만사 다 필연적이다’라는 뜻을 지닌 ‘케이 세라, 세라’로 더 잘 알려진 이 노래는 데이의 상표가 된 곡으로 오스카 주제가상을 탔다.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했는데 ‘될 대로 되라’하면서 신세 한탄하는 사람들이 후렴처럼 빌려 쓰기도 했다.
배우이자 가수요 동물애호가로 미국의 국보급 존재였던 데이가 13일 캘리포니아주 카멜에서 97세로 타계했다. 데이하면 연상되는 모습이 깨끗하고 단정하고 착한 이웃집 아주머니의 그 것이다. 배우와 가수로서 데이의 인기가 절정을 이룬 1950년대 태평성대를 누리던 아이젠하워 시대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데이는 이렇게 현모양처 형이면서도 야릇한 성적매력을 발산했는데 그의 목소리도 감칠맛 나게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관능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가수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데이는 연기보다는 노래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데이의 연기는 무던한 편으로 그가 나온 많은 영화들이 로맨틱 코미디여서 보기엔 즐거우나 탁월한 연기력을 발휘할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흥행몰이를 했던 데이는 생애 39편의 영화에 나와 록 허드슨과 공연한 로맨틱 코미디 ‘필로 토크’로 딱 한번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데이와 허드슨은 이 영화 외에도 또 다른 로맨틱 코미디 ‘러버 컴백’과 ‘센드 미 노 플라워스’등에서 좋은 콤비를 이뤘었다.
데이가 나온 또 다른 로맨틱 코미디들로는 클라크 게이블과 공연한 ‘티처스 펫’ 리처드 위드마크와 공연한 ‘터널 오브 러브’, 데이빗 니븐과 공연한 ‘플리즈 돈 이트 더 데이지스’및 제임스 가너와 공연한 ‘무브 오버, 달링’ 등이 있다. 데이의 마지막 영화는 역시 로맨틱 코미디로 브라이언 키스와 공연한 ‘위드 식스 유 겟 에그롤’이다. 이들은 다 그저 기분 좋고 따스한 무공해 영화들이다.
그게 그거 같은 이런 영화들을 제치고 데이가 십분 연기력을 발휘한 영화가 웨스턴 뮤지컬 ‘컬래미티 제인’이다. 데이는 여기서 서부시대 실제 인물이었던 총 잘 쏘는 괄괄한 남자 스타일의 컬래미티 제인으로 나와 맹렬한 연기를 한다. 여기서 데이가 부른 주제가 ‘시크릿 러브’도 오스카 주제가상을 탔는데 이 영화는 데이가 가장 좋아하는 자기 작품. 데이의 상대역인 전설적인 서부의 총잡이 와일드 빌 히칵으로는 하워드 킬이 나온다.
그리고 뮤지컬 드라마 ‘러브 미 오어 리브 미’에서는 1920년대 시카고의 실제 갱스터였던 마틴 스나이더(제임스 캐그니)의 가수 연인 루스 에팅으로 나와 호연했다. 또 스릴러 ‘미드나잇 레이스’에서는 스토커에 시달리는 부잣집 아내(남편 역은 렉스 해리슨)로 나와 자주 비명을 질러대면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데이는 ‘케이 세라, 세라’와 ‘시크릿 러브’ 외에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센티멘탈 저니’와 ‘이츠 매직’ 그리고 ‘바이 더 라이트 오브 더 실버리 문’이다. ‘센티멘탈 저니’는 1945년에 나와 2차대전 참전 미군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데이는 생애 뒤 늦게 2011년 자신의 히트곡 모음집 ‘마이 하트’를 출반했는데 이 음반은 나도 갖고 있다.
데이는 2011년 LA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생애업적상 수상자로 뽑혔다. 그러나 2012년 1월에 열린 시상식만찬에는 참석치 않고 대신 집에서 전화로 보낸 고맙다는 메시지를 들었던기억이 난다. 데이는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매우 사랑한 스타였다.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을 비롯해 무려 세 차례나 인기상을 탔다.
온화하고 상냥한 모습으로 가정생활도 평탄할 것 같았던 데이는 뜻 밖에도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모두 네 차례 결혼했는데 세 번째 남편 마티 멜처는 데이가 벌어놓은 돈 2,000만달러를 아내 몰래 투자해 탕진하고 50만달러의 빚까지 남기고 죽었다. TV출연을 싫어하는 데이가 1968년 CBS의 ‘도리스 데이 쇼“의 호스트를 수락한 까닭도 파산에서 벗어나고 죽은 남편의 동업자를 상대로 제기할 소송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데이는 1970년대 초 은퇴해 카멜에서 동물애호가로 활동했다.
신시내티에서 출생한 도리스 데이(본명 도리스 카펠하프)는 처음에 10대 때부터 재능을 보인 댄서로 활동하려고 했으나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쳐 포기했다. 이어 라디오쇼에서 노래하는 데이의 음성을 들은 신시내티의 밴드리더 바니 랩이 데이를 자기 나이트클럽 쇼에 출연시키면서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데이는 생애 총 30곡의 탑20를 기록했다. 미국의 스윗하트라 불리던 데이는 이제 저 세상으로 ‘센티멘탈 저니’를 떠났다. 페어웰 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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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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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4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Mid님~ 케이 세라 세라...
보수적인 생각을 같고있는분들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 예전부터 아무리 반대하고 사형까지 시키며 변화를 막으려했지만 한번 시작된 변화는 결국은 이뤄지고맙니다. 지구가 둥글다는설을 부정하던이들, 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설을 부정하던이들, 노예제도페지에 반대하던이들, 여성동등권에 반대하던이들, 모든 개인이 컴퓨터소지하는건 꿈이라고하던이들, 그리고 요즘은 낙태의 권리, 동성연애자의 권리, 불체자의 권리가 이슈인데 이것도 아무리 반대한들 결국은 바뀔텐데…
가사 내용처럼 우리가 미래를 볼수 없듯이 일어날 일은 일어날거고 될것은 그대로 될테니 그냥 흘러 가게 놔두지요.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일이 그리 많지않지만 사람은 사람을 잘만나야(因緣인연) 원만한 삶을 보낼수있지요, 트럼프같은 사람은 돈은 있을지 모르지만 순간순간 어디로 튈지 오리무중이니 죽는날까지 고생할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