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봄볕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막 봉오리를 연 뒷마당 수선화에 눈길을 주면서도 마음은 점심 준비할 생각에 가있다. 국수를 먹을까? 오늘은 국물 있는 잔치국수가 어떨까. 남편이 좋아하기도 하지만 뚝딱 삶아내면 그만인 국수는 만들기 쉽고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된다는 이유로 요즈음 상에 자주 오른다.
아들이 결혼한 후 우리 부부만 남으니 식단이 더할 수 없이 간소해졌다. 아침은 간단하게 먹었다. 토스트에 달걀 프라이, 갓 내린 커피면 충분했다. 마음에 점만 찍는다는 점심(點心)으로는 주로 국수를 삶았다. 이름만 다른 국수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이니 뭘 먹을지 고민할 일도 번거로울 일도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날엔 얼음 띄운 냉 콩국수가 상에 올랐고, 비 오는 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엔 뜨끈한 칼국수가 제격이었다. 속이 컬컬할 땐 냉면을 삶았고, 어쩌다 고국이 그리울 땐 한밤중에도 라면 봉투를 뜯었다.
물이 끓기 시작한다. 물방울이 올라가며 보글거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정신을 빼앗긴다. 일상에서 맛보는 아름다운 소리다. 국수 삶는 물이 요동칠 때는 내 가슴도 소용돌이치며 한때 격정의 시간을 살던 기억을 불러온다. 강말랐던 국숫발이 몸을 풀며 부드러워지는 시간을 무심히 지켜본다. 스스로 만든 원칙과 규정에 매여 필요 이상 옥죄고 살다가 나이 들면서 헐거워지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찬물에서 건져 대나무 채반에 가지런히 말아놓은 사리를 국수 대접에 하나씩 옮겨 담는다.
멸치와 다시마로 제법 바다 냄새가 배어든 국물로 토렴을 하는데, 오래 전에 내게 토렴을 가르쳐준 할머니 얼굴이 스쳐간다. 그립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그리움이 아릿한 얼굴을 들면 손은 마냥 더뎌진다. 볶은 애호박과 채 썬 김치, 달걀지단을 고명으로 얹으면서 잔치국수 두 그릇을 점심상에 올린다. 말없이 마주보는 두 그릇 사이로 잠깐 봄 햇살이 다녀갔나 싶은데, 후르륵 소리에 얹혀 국수 가락이 넘어간다. 봄 햇살처럼 잠시 다녀간 듯한, 내가 걸어온 짧지 않은 세월도 이렇게 지나갔지 싶다.
내 기억에 자리 잡은 나 어릴 적 부엌은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여섯 식구 밥상 차리는 일이 당연한 듯 매일 반복되었다. 물소리 가득한 한쪽에서는 늘 무엇인가로 김이 오르고 있고,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가 출렁이고, 어머니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 아흔이 넘은 어머니의 부엌은 머지않아 문이 닫힐 것이다. 당신의 생이 외로운 침묵으로 서서히 닫혀가듯이.
간장 한 방울 된장 한 숟가락에도 줄줄 매달려 올라오는 손맛의 기억과 기억. 멀리 있는 기억이 불러낸 음식으로 이국에서 허허로움을 다독이던 시간과 시간. 고국에서 전화로 알려주는 어머니의 조리법을 들으며 옛 맛을 더듬어 만든 음식은, 그러나 그때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없던 입맛이 돌아오는 걸 보면, 나는 음식을 통해 어머니와의 유대감을 이어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분은 이제 그때의 입맛도 손맛도 다 잃어버려, 당신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손맛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음식 만들 때면 어머니 생각을 한다. 식구들이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엌으로 들어서던 어머니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부엌은 그분 삶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공간이었다. 생활에 지쳐 흔들릴 때는, 옛 부엌을 떠올리며 그곳에서 만들어지던 음식 냄새를 맡기만 해도 허기진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엌에 맴도는 국수 냄새. 냄새는 때로 먼 기억을 불러온다. 익숙한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부엌에 다다르고, 밥상에 앉은 얼굴들이 보이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부엌은 음식을 통해 가족을 밥상으로 불러 모으고 마음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공간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뿐 아니라 그때 느끼던 모든 표정과 감각이 단숨에 읽혀지는 익숙한 공간. 그 풍경이 한꺼번에 살아나면서 기억 속에 묻혀있던 감정이 불려나오고, 그것이 현재의 감정에 덧입혀지기도 한다.
내일은 마음에 어떤 점을 찍을까. 아침과 저녁 사이 햇살 가득한 시간에 조촐하게 준비하는 점심이다. 맛이 있어도 없어도 맛있게 먹어줄 한 사람. 같이 먹을 사람이 옆에 있어 부엌이 움직인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피할 수 없는 바람에 때로 속을 끓이다가도, 냉수에서 몸 풀고 헤실거리는 국수 가락을 보며 시름을 잊던 부엌에서의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나에게 부엌은 그런 곳이다. 내일도 식탁에 오른 국수 그릇이 비워질 때쯤이면, 세상 근심 덜어낸 넉넉함으로 늦은 오후를 가볍게 채워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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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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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무리 스산해 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인간다움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