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가주 샌타 로사에 사는 정성연 씨는 건축가이다. 남편과 함께 남매를 키운, 웃음 가득했던 가족의 보금자리도 직접 설계했다. 2017년 10월말 소노마와 나파 카운티를 휩쓸며 건물 수천 채를 태운 터브스 산불이 집동네로 다가들 때 그는 기도를 했다. 신과의 거래였다.
“내 집 가져가세요. (대신)내 아이 돌려주세요.”
결과는 반대였다. 집은 무사했다. 딸 엘리자베스의 정신질환은 더 심해졌다. 산불 나고 두 달여 후 딸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고 그 후유증으로 4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유난히 명석해서 10학년 마친 후 16살에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에서도 우등생으로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던 딸은 지난해 5월 19살로 생을 마감했다.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2~3년은 사투였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중증 우울증은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정씨는 정신질환에 대한 의료서비스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절감했다고 말한다. 부부는 딸을 기념하는 비영리재단을 만들고 정신질환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관련 의료체계 개선 촉구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은 참척이라고 한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고통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어린 나이의 자식을 자살로 잃는 충격일 것이다.
근년 그런 참혹한 슬픔에 내몰리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10대 후반~20대 초반 연령층의 자살이 이례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3월 중순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2017년 기준, 미국의 20세 전후 청(소)년은 이전의 밀레니얼 세대가 같은 나이였을 때에 비해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고, 중증 우울증과 자살 위험이 높다.
전국에서 근 800만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2008년에서 2017년 사이 18~25세 연령층의 자살은 무려 56%가 뛰어올랐다. 자살을 심사숙고한 경우는 68%가 증가했고, 자살시도는 20~21세의 경우 87%, 22~23세는 108%나 치솟았다. 단기간에 너무 큰 변화이다.
아울러 2017년 기준 1999년생은 1985년생에 비해 심리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확률이 50%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세 전후 젊은 세대가 정신건강에 문제가 많으며, 전반적으로 행복도가 떨어진다는 결론이다.
봄날 새잎 돋는 나무처럼 한창 싱그러울 나이의 젊은이들이 왜 행복하지 않을까. ‘이상 심리학 저널’에 이번 연구결과를 발표한 샌디에고 주립대학 연구진은 이들 디지털 세대의 과도한 기기사용과 만성적 수면부족을 주요 요인으로 지목했다.
같은 기간 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낸 시간이 현격하게 줄었다는 사실도 연구진은 덧붙였다. 틈만 나면 디지털 기기 붙들고 지내느라 친구들과 노는 시간도, 잠을 자는 시간도 줄었다는 분석이다. 사람보다 기계가 더 재미있고 더 편안한 세대이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 시대적 경계선을 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인류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 없던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인류, 디지털 토착민이다.
미국의 교육학자 마크 프렌스키는 현대인을 디지털 토착민과 디지털 이민자로 구분했다. 성장해서 디지털 기기를 접한 ‘이민자’들과 달리 ‘토착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자랐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아이팻을 가지고 놀고, 얼굴을 마주 보기보다 스크린으로 대화하는 게 자연스러우며, 밖에 나가서 뛰어놀기보다 실내에서 게임기 들고 놀 때 더 몰입한다.
셀폰 작동도 서툰 구세대 ‘이민자’들, 디지털 문맹자들 보기에 이들은 첨단기기 척척 다루는 멋진 신세대이다. 그런 그들이 왜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며 자살을 생각하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한 원인으로 보인다. 단절은 우리의 본성과 맞지가 않다.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고, 진화의 지상명령은 적응이다.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 수렵채집하며 수만년 적응한 결과가 지금의 인류라고 진화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에 비하면 기계문명 200년, 디지털 문명 20~30년은 찰나에 불과한 시간. 우리의 유전자는 여전히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수렵채집인의 머리와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리를 이루고 가족과 친구, 친척들에 둘러싸여 살던 생활이 유전인자로 박혀있다.
우리가 지쳐있을 때 부드러운 눈길, 푸근한 격려의 손길, 정다운 말 한마디, 그냥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체취 하나로 신비롭게도 힘을 얻는 배경이다. 우리는 그런 일상적 접촉에서 정신적 영양을 공급받는 존재이다.
디지털 신인류를 자녀로 키우면서 부모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접촉’이다. “네 옆에 내가 있다”고 눈으로 손으로 말로 항시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런 따뜻함이 방패가 되어 혹시 찾아들지 모를 자살충동을 밀쳐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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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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