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은 해소되지 못한 고통. 원통함을 원통함으로 인정받지 못한 고통. 그래서 용서하고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니 고통은 거대한 똬리가 되어 평생 의식을 짓누른다.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여성들은 그렇게 반백년을 살았다.
일제치하 조선의 어린여성들은 속아서, 협박받아서 전장으로 내몰렸고 그곳은 사람의 공간이 아니었다. 짐승도 당하지 않을 참혹한 고통 속에 짐승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다행히 목숨 부지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이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수치스러워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수치스럽다고 가족들이 외면했다.
1945년 해방이후 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까지 근 50년, 한국사회는 그들이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존재하되 없는 존재였던 그들이 “내가 증거!”라며 피맺힌 외침을 이어온 지 근 30년, 그들은 속속 세상을 떠나고 종군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아있다.
김복동 할머니가 28일 별세했다. 위안부 피해자로, 전시 성폭력 피해여성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지칠 줄 모르고 활동했던 할머니는 “끝까지 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끝’을 못 보고 떠나는 원통함이 담긴 유언이었다. ‘끝’은 어린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은 반인륜 범죄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할머니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한 맺힌 92년의 생을 마감했다.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은 다급함으로 다가왔다. 위안부 강제동원이라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사명감을 가지고 규탄했던 ‘활동가’ 할머니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90세의 이용수 할머니가 남아있을 뿐이다.
1991년 8월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최초로 공개함으로써 위안부 이슈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73세로, 1992년 11월 UN 증언으로 미국사회에 일본 만행을 알린 황금주 할머니는 2013년 86세로, 2007년 2월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증언함으로써 연방하원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던 김군자 할머니는 2017년 89세로 …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217명이 사망하고 23명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91세. 대부분 지병으로 사회활동은커녕 거동도 불편한 상태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이 찾아와 조문하는 등 사회적 관심이 높은 것은 여성인권운동의 상징으로서 할머니의 위상에 더해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사라져간다는 위기감이 함께 한 때문으로 보인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미완인 채 넘겨지려는 참이다. 김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몰아 “끝까지 싸워 달라”는 말을 남긴 배경이다.
할머니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니 그들이 남긴 유산을 돌아보게 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인간으로서 특히 여성으로서 극한의 고통을 겪었다. 그로 인해 평생 수치와 두려움, 소외의 삶을 살았다.
일본의 종군위안부 정책에 20만 조선의 딸들은 젊음을 빼앗겼고, 존엄성을 빼앗겼으며 결혼하고 아이 낳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을 빼앗겼다. 가슴은 울분과 설움으로 가득 차고 한은 깊었다. 여성으로서 그보다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면서 자신들의 삶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었다. 위안부 피해자로서 첫 공개회견을 할 당시 고 김학순 할머니는 67세였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생각하니 “나올 때 좀 무서웠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70이 다 되어 이제 죽어도 괜찮을 나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계집애가 ‥ 이 꽉 깨물고 ‥ 강간을 당하는 … 그 참혹한 … ” 고통을 증언했다. 묻혀있던 위안부 이슈가 한국과 일본사회에 공론화 되는 순간이었다.
침묵의 벽이 깨어지면서 피해자들의 증언은 이어졌다. 1992년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완강했다. “부끄러운 여자들” “무슨 자랑할 일이라고 떠드는 가” … 비난이 거세 할머니들은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고 시위에 참가했고, 보수단체 회원들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그렇게 근 30년, 많은 할머니들은 인권운동가로 당당하게 거듭났다. 위안부 이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알려진 성의 노예로 만든 사실”(연방하원 결의안 제1조항)로 정리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대로 죽느니 말이라도 하자”며 할머니들이 용기를 낸 결과이다. 한이 깊어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갖는 힘이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리는 조문행렬이 길다. 평생의 한을 인권운동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승화시킨 할머니에게 사회는 경의를 표했다.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으로 할머니는 세상을 하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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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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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말만들어도 난 통일이 제일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피가 끌어오른다, 일본이 미워서? 아니! 난 그렇게 당했는데도 일본에게 통일을해 그들보다 잘사는 대한민국이 될수있는데도 통일을 안하는? 못하는? 남 핑게대는 미련한 궁민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