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황금 돼지 해가 밝았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십이간지(十二干支) 앞에 특별한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백마, 청양, 붉은 원숭이, 황금 돼지…. 열두 동물 중에서 돼지는 꿈에 보기만 해도 복을 부른다는 동물이다. 거기에 황금까지 입힌 돼지해이니 올해를 여는 보신각 종소리에 마음을 기댄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묵은해의 힘겹던 기억들을 지우며 새해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새해 첫날도 어제의 다음 날일 뿐인데 굳이 해를 나눠서 새로 시작하려는 심리 이면에는, 잊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지난했던 묵은해를 그렇게라도 매듭지어 두고,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출발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그렇지 않을까, 나름의 생각을 해본다.
새해맞이 일출을 보러 모여든 사람들에게 새해 소원이 무엇인지 기자가 물었다. 자신의 꿈을 말하는 젊은이들 표정은 이미 꿈을 이루기나 한 듯 밝았다. 곁에 있던 젊은 부부는 안고 있는 아기에 관한 소망을 빌었다. 한파에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 싶게 허리 굽은 어떤 할머니의 바람은 손주의 건강과 성공이었다.
내 친정어머니의 기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흔이 넘어서까지도 아침에 눈뜨면 습관처럼 자식들 무병장수를 빌었고 잠들기 전에도 하루를 마무리 지으며 기도를 하셨다.
누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엄마가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하며 자식 아픈 게 마치 자신 탓인 양 기도시간을 늘이며 정성을 더했다. 간절함이 하늘에 이르면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믿음에서였을 것이다.
자식이나 손주가 있는 이들의 소망은 한결 같이 자기보다는 자식이 우선이었다. 서양사람들도 그럴까. 자식 사랑은 인종과 국적에 관계없이 비슷하겠지만, 주어가 늘 ‘I’로 시작되는 서구문화에서는 어떨는지.
오래 전에 집 근처의 작은 교회로 성경공부를 하러 다녔었다. 이민온 지 6년 되던 해였고 여러 가지로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시기이기도 했다. 성경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영어도 공부할 겸 동네 사람들과 가까워지겠다는 생각이 컸다. 실제로 내가 참석했던 여덟 달은 성경공부보다 이들의 문화를 가까이서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추수감사절에 테이블 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칠면조를 본 것도, 서양사람 집에 초대받아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해본 것도 이들을 통해서였다.
해가 바뀌자 리더는 첫 수업을 각자 새해결심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새해소원이 아니라 새해결심이었다. 소원과 결심의 차이는 무엇일까.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단어 뜻에 매달려 있느라 새해를 맞아 내가 무엇을 이루고 싶었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새해결심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일 터였다. 교실에는 여러 인종이 있었는데 다들 이곳에 오래 살았는지 자연스럽게 자신의 새해목표를 이야기했다. 그들의 결심은 작지만 구체적인 것들이었다. 노력 없이 간절함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복이 소원이리라. 반면에 결심은 스스로 노력하고 실천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을 의미하겠지 생각하면서도,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말할 준비를 못했다.
나는 결국 해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포괄적인 소망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각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그냥 넘어갔으면 했는데 질문이 날아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룰 것인지 말해줄 수 있느냐고 했다. 활짝 웃으며 애정 어린 관심으로 묻는 질문인데도 말할 준비가 안 된 나에게는 공격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결국 영어로 가장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목표가, 본의 아니게 그 해에 내가 소망하고 이루고자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 후 나는 새해 첫날이면 그때를 떠올리며 새해의 다짐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라 해도 때로는 월별로 때로는 분기별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끝까지 제대로 실천한 적은 드물지만 크고 광범위한 계획보다는 성취감을 높일 수 있었다.
결심을 한다는 건 꿈과 희망을 갖는 일이다. 꿈을 설계하는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마치 꿈을 이룬 듯한 흐뭇함을 맛보기도 한다.
황금 돼지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사람들이 무턱대고 복을 달라고 빌기보다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런 이들이 자신의 꿈에 다가가도록 돕는 것일지도 모른다. 황금 돼지가 가져다 줄 복을 소망하기에 앞서, 내가 한 해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한다.
앉아서 바라지 말고 뛰면서 얻자. 스스로 하는 다짐이다. 건강을 원한다면 어떤 생활습관을 가져야 좋을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어떤 환경을 조성해야 할지.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심을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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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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