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칼럼(왼쪽 위). WP 김용익 선생과의 인터뷰가 실린 재팬 타임즈(왼쪽 아래). 워싱턴 한국일보에 발표된 시.
내가 40이 되던 해 대학을 떠나 2년 케스퍼 와인버거 Caspar Weinberger 미국 국방장관실 환경정책보좌관 Assistant for Environmental Quality 으로 일하면서 워싱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1981년 10월 1일 펜타곤 Pentagon에 들어서니까 내 보스는 서류함에 있는 서류들을 검토하고 새로운 국방부가 채택할 환경 정책 제안을 만들어 내놓으라고 했다. 첫 일주일을 마치고 나서 나는 워싱턴 포스트 Washington Post 일요판에 나가는 일주일간의 일기를 쓰게 되었다. 그 당시 그 고정 칼럼 Company Town은 외부인사의 기고로 짜여지고 있었다. 타자기로 친 글을 보내고 났더니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주 일요판에 내 글이 나가는데 사진기자를 보낼테니 받아들여 달라는 청이었다. 사진기자가 내 방에 와서 한 롤 roll 이상을 찍고 나갔다. 바로 포스트 편집인에게 “고맙다” 전화를 했더니, “최박사님, 아직 워싱턴 포스트를 방문하지 않으셨으면 기쁘게 안내 하겠습니다” 라는 응답이 왔다. “아침 11시에 신문사에 오시면 신문사를 들러보고 12시 점심식사를 함께 하시지요.” 나는 그런 대접에 놀랐다.그렇게 나는 처음 워싱턴 포스트를 방문했다. 포스트 일요판 Outlook 편집인은 중년의 신사였다. 반갑게 나를 맞으며 포스트 층층을 안내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그 분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대학교수들에게 글을 쓰라고 하면 대학원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써보내요. 신문사가 원하는 글은 고등학교 졸업생 정도가 읽을만한 글이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그런 글을 보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저가 여기 기자로 입사해서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고 신문사는 양적으로 대단히 성장했지만 오히려 내 젊은 기자 시절 신문의 질은 더 높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 기자의 수는 지금의 반도 안되었습니다만.“
참으로 겸손한 분이었다.
그 분과의 인연으로 나는 후일 미국 속의 원로 작가 김용익 선생을 인터뷔하여 일요판 한 페이지를 게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어찌하여 김용익 선생을 이 도시에 처음 초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여기 필요하다.
1980년대 이 도시 VA 알렉산드리아에 한국 YMCA가 있었고 총무를 정준영 선생이 맡고 있었다.그 분은 내 또래로 정말 봉사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처음에 한인이민자들을 위해서 영어 선생으로 나를 초빙했다. 급료가 없는 봉사자로 일주일에 하루 저녁 2시간, 3시간 영어선생을 맡고 있을 때 그가 내게 던진 말이다.
“최교수님, 이 도시에도 문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야지요. 먹고 살기 급급한 이민 1세대에게 문학이 소용되겠습니까?‘
그 다음 주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제안을 검토했다.
이 도시에 그리 멀지 않은 피츠버그에 “꽃신”으로 유명한 작가가 살고 있으니 YMCA 초청 강연을 주선하게 되었다.그렇게 미국 최고의 저명한 한국 작가가 초라한 한국 YMCA 강연에 오시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 신문 어느 하나도 김용익 선생 문학 강연을 보도하지 않았다. 나는 분노를 다스리면서 워싱턴 포스트 주말 판 편집인에게 미국 속의 최고 한인 작가가 내방하는데 한 페이지 대담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대담 녹음 테이프와 글을 함께 보내달라고 해서 녹음기를 갖추고 한 나절 그 분의 문학으로 살아온 삶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포스트에 대담기사가 나가니 중앙일보 특파원이 그 기사를 서울 본지 문화면에 크게 보도했고 그 결과 문학사상의 임홍빈 회장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여기까지 나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 월간지의 워싱턴 특파원으로 문학적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사상 원고료는 서울의 내 어머니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 아들 글을 읽는 기쁨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대담기사는 일본의 Japan Times와 유럽의 주요 일간지에 전재되기도 했다.
내가 국방성의 고급관료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한국일보 발행인이 내 대학 선배로 일주일에 한번 “최연홍 칼럼”을 연재하도록 주선해 주어 한국일보와의 인연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그 무렵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가 추도기간 후 내 집에 오셔서 겨울을 지내고 계셨는데 벽난로 옆에서 내 털옷을 짜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12월의 시”로 담아 한국일보에 발표했다. 언제부터 나를 대표하는 “12월의 시”. 12월이 오면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그 시의 발상지는 바로 워싱턴 한국일보에서 시작했다. 내가 서울 한국일보가 첫 면에 시 한편씩을 계제하기 시작했던 60년대, 내가 ROTC 육군소위로 한국일보 첫 면의 시인으로 여러번 초대 받았던 이후 이어진 한국일보와의 긴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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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시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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