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골목길을 걷다가 콩나물 국밥집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유리창에 김이 서려있어서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이미 손님으로 가득한 식당은 재래시장에서나 느낄법한 사람 냄새가 섞여있는 듯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메뉴판을 펼칠 것도 없이 콩나물 국밥을 주문했다.
실내를 둘러보다가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따뜻한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토렴하는 할머니가 보인다. 손님이 붐비는 점심시간이니 그저 국물 한 국자 부어서 말아주어도 그만일 것을. 토렴을 한 국밥은 따듯함이 오래가기도 하지만 국물 맛이 밥알에 배어들어 깊은 맛을 낸다. 가게 안에 서린 뽀얀 김이 마치 국밥 한 그릇 한 그릇에서 나온 정성 같아 정겹다.
할머니는 무심한 얼굴로 여전히 토렴을 하고 있다. 걸어온 길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골 깊은 주름을 타고 수증기가 번지며 할머니 표정에 안개 같은 신비감을 더해준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투박한 미소가 얼핏 보인 것도 같고 일체의 생각을 벗어버린 얼굴 같기도 하다. 국밥집 할머니 얼굴 너머로 또 한 할머니의 얼굴이 고개를 내밀고 올라온다.
내 아이가 두 살 되었을 무렵부터 아이를 돌봐주던 할머니가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그분은 키가 나보다 한 뼘은 더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골격도 컸다. 젊었을 적에 쌀 두 가마니를 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그랬겠구나 하고 믿어지는 체격이었다.
할머니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부드럽고 따듯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입술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던 분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머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면 할머니는 가슴으로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고 할까.
우리 바로 앞집에 살던 친정아버지가 오래된 위궤양으로 고생하실 때였다. 한여름에 고향에 다녀오마고 떠난 할머니가 사나흘 만에 돌아왔다. 할머니 머리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 얹혀있었고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대체 뭐길래 저 큰 통을 이고 왔을까 하며 통 안을 들여다보던 우리는 울컥하여, 숨을 삼킨 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위장병을 고친다고 알려진 할머니 고향 산골 약수가 통에 가득 담겨 출렁이는 게 아닌가. 대구에서부터 머리에 이고 온 게 아버지 병을 고치려는 약수였다니.
엄마가 침묵을 깨며 그걸 여기까지 어떻게 들고 왔느냐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소싯적에는 쌀가마도 번쩍번쩍 들었는데 나이 먹으니 좀 힘들더라며 멋쩍게 웃던 할머니 웃음이 부처님 미소가 아니고 무엇일까.
할머니는 우리 식구와 피붙이 이상의 정을 나누며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다. 내 아이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다면 그건 아마 경상도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럴 것이다.
점심 손님이 빠져나간 식당이 휑하게 느껴진다. 김이 서려 뿌옇던 실내가 맑아져서 할머니 얼굴이 멀찌감치에서도 선연하게 보인다. 투박하다고 여기던 표정이 수증기를 걷어내고 보니 푸근함으로 바뀌어 있다. 할머니의 정성을 담은 따끈한 국밥은 손님의 지친 몸을 달래고 고단한 삶을 위로해줄 터. 주방에서는 저녁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김치와 밑반찬이 담긴 통을 일일이 열어보며 챙기는 모습이 자식을 위해 부엌에서 밥상을 준비하는 어머니를 닮았다.
나는 다시 경상도 할머니 생각에 잠긴다. 부침개를 좋아하던 분이었다. 퇴근하여 돌아오면 무언가를 부쳐놓은 접시가 으레 식탁에 놓여있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모두 부침개 감이었고 하다못해 푸성귀 하나만 있어도 부침개가 되었다.
할머니의 부침개는 단순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까지 빈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이며 기진하여 퇴근한 내게 뭐라도 먹이려는 사랑이었다.
부침개만 먹으면 목이 멘다며 멸치 네댓 마리로 어느 틈에 국물을 내고 국수를 말아 김치 몇 조각 얹어주던 할머니. 그분도 국수를 말 때 토렴을 하곤 했다. 그냥 달라고 해도 그래야 따뜻하게 먹는다며 몇 번씩 국물을 바꾸던 할머니의 큼지막한 손이 그립다.
시린 겨울에 따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면 두 할머니의 온화한 얼굴이 갈마들며 마음이 훈훈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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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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