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위스콘신대학교 교수 생활을 시작으로 1996년 서울 시립대로 떠날 때까지 나는 정치학과, 행정대학원, 경영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면서 문학에 온 정성을 쏟으며 살았다. 내 나이 31세에서 55세 이르는 황금기를 미국에서 대학교수, 고급 관료로 보냈다. 돌아보면 세월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 세월 나는 한국 시인으로 살았다. 내 이력서를 들추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 추억을 더듬어 간다.
1972-73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1년 가르치고 버지니아 항구 도시인 노폭(Norfolk)에 위치한 버지니아 주립대학 중의 하나인 올드 도미니언 대학으로 옮겼는데, 위스콘신 주소로 보낸 황갑주 시인의 편지가 버지니아 새 주소로 날아왔다, 내가 버지니아에서 받은 첫 번째 편지였다. 그 편지는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황 시인이 동인지를 간행하려 하며, 편집인으로 마종기 시인과 나를 초대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와 나의 오랜 우정, 문학의 인연을 쌓은 계기가 되었다. 순창 출신으로 매천 황현의 후손인 그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었다.
타자기로 찍혀서 나온 『지평선』은 미국 한인 문학사에 남을 만한 동인시집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 보면 조판이 거칠고 깔끔하지 못한 부끄러운 외양이지만 미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문학동인지라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다. 『지평선』 1, 2, 3집이 출간된 후 『재미 한국시인선』이 나오고, 80년대 들어와 송상옥, 김호길이 미국으로 건너와 문인회를 발족시키게 되지만 처음 『지평선』 이 출간되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황 시인과의 인연으로 나는 소위 말하는 반체제 문인이 되었다. 유신 시대, 전두환 시대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나오는 신한민보 칼럼니스트로 김지하를 죽이지 말라는 탄원서, 공개서한을 박정희 대통령께 썼다. 그 편지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유통되었고, 한국 안에서 쓸 수 없는 글을 누군가가 썼어야 한다고 나를 격려하는 편지도 받았다. 황 시인은 광주 의거가 발발하자 『빛의 바다』라는 우리들의 공동 시집을 펴냈고, 이어서 『빛이 타는 바다』를 펴냈다. 그 시집 사이에 일본의 반체제 한국계 시인들과 우리 동인들의 공동 시집,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를 펴내기도 했다. 1987년까지 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후일 한국에 돌아가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큰 것을 알았고, 내 지성이 나이 듦과 함께 성숙해짐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브라질의 에스피리토 산토 대학(Federal University Espirito Santo)의 비교문학과 파울로 데 파울라(Paulo De Paula) 교수가 그의 대학원생들과 내 시를 포르투갈어로 번역, 출간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와 나의 영시 20여 편을 보낸 결과 1978년 작은 시집으로 출간되었고, 브라질 일간지 《A Tribuna Vitoria》는 “A nacionalidade da lingua”라는 제목으로 “No aprendizado da vida e Solidao…”라는 부제를 붙여 사진과 함께 크게 소개하였다. 굳이 번역하자면 “학습할수 없는 삶 그리고...고독”이란 부제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구호도,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국제교류진흥회나 대산문화재단, 한국문학번역원 등 번역 지원사업을 하는 공익 재단이 미미하던 시절에 내 시가 포르투갈어로 번역, 브라질에 소개된 것을 나는 가장 소중한 문학적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 후 브라질을 다녀왔지만 언젠가 에스피리토 산토 대학을 방문해 파울로 교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점심이라도 대접하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였다. 사족을 달자면 당시 브라질 북부에 있는 에스피리토 산토 대학 방문은 여의치 않았고, 이미 그가 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유명을 달리했으리라는 짐작이 그 꿈을 접게 했다.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아마존강 하구에 있는 작은 도시의 대학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의 전통이 길지 않고 세계문학 속에서 그 위상이 그리 크지 않은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여러 공익 재단이 번역가 지원이나 기금을 통한 많은 중요한 도움을 주고 있으나 문학의 세계화는 번역 사업 양성이나 기금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개별 나라의 고유한 문학적 특성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관심을 끌며 그것이 보편적 가치로 수용될 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 다른 문화권에 작품을 발표하고 활동했던 나의 경험을 나누며 문학의 세계화는 어떻게 와야 하는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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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 <시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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