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사형으로 자른 수북한 양파, 스테인리스 팬에 설탕 약간 넣고
▶ 진한 갈색 될 때까지 볶으면, 강한 단맛‘양파 캐러멜’완성
양파는 중심에서 단면이 원형으로 켜를 이루는 채소다. 양파를 왼손으로 잡고 수직으로 세워 윗동과 아랫동을 썰어낸 뒤 손질한다.
오래 볶아서 단맛이 폭발한 양파를 빵이나 스테이크에 곁들여 먹으면 풍미가 한층 좋다.
4급 현역 입대자였던 내가 자대에서 몇몇 보직을 전전한 뒤 자리를 잡은 곳은 취사장과 대대 본부중대 사이의 어딘가였다. 맞다, 모두가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이다. 나도 좋아할 리 없으니 최대한 짧게 늘어 놓아 보자. 취사장과 대대 본부중대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식품 관리 담당, 즉 1종 계원이 된 것이다. 사단 보급 대대의 중대 1종 계원이었으니, 도매 시장에서 식당 물건을 떼어 오는 수준의 대수롭지 않은 임무였다. 그래서 전임과 후임은 취사병이 짬을 내어 겸업하던 보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만 예외였다. 그리하여 반찬 단지에 고양이 발 드나들듯 취사장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고기도 내려 놓고 고추장 깡통도 창고에 쌓았다.
양파는 방사형으로 칼을 넣어 썰어야 양파를 손질하는 요령을 배운 것도 그때였다. 훔쳐 보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양파를 왼손으로 잡고 수직으로 세워 윗동과 아랫동을 썰어낸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 식칼로 가볍게 탁, 내리치면 겉껍질부터 맨 바깥쪽 켜에 칼집이 들어간다. 덕분에 맨 바깥쪽 켜와 함께 껍질을 손쉽게 벗겨낼 수 있다. 한 번 따라 해 보자. 일단 칼질의 여건부터 갖춘다. 종이행주에 물을 살짝 축여 가볍게 짠 뒤 펼쳐 싱크대에 깔고 도마를 올린다. 식칼은 벼리쇠로 좌우 번갈아 3번, 2번, 1번씩 벼려 그 동안의 칼질에 미세하게 굽은 날 끝의 각도를 세워준다. 이제 도마는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고 칼의 날 끝은 살아 났으니 양파를 손질하기가 한결 편할 것이다. 썰고 세워 칼집을 넣고 벗겨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누군가는 반발할 것이다. 맨 바깥쪽 켜를 버리라는 말 아닌가. 맞다. 하지만 손으로 양파의 얇으면서도 뻣뻣한 껍질만 벗겨내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데다가, 껍질 바로 안쪽의 켜는 상처를 입거나 이미 물러진 경우도 많다. 게다가 몇 개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겠지만 정말 많은 양파가 필요하므로 손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칠 수 있다. 그러니 맨 바깥쪽 켜는 과감하게 버리자.
스테인리스 팬에 캐러멜화를 촉진하기 위해 설탕 약간을 뿌려 중간 센 불에 일단 올리고 양파를 썰기 시작한다. 취사병들은 정말 무섭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도 경쾌하게 300명분의 양파를 매 끼니마다 처리했다. 오른손잡이라면 가볍게 주먹 쥔 왼손을 내밀어 양파에 얹고 다가오는 칼에 맞춰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써는, 전형적인 칼질이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도 경쾌하고 칼질하는 오른손도 우아해 누구라도 탐을 낼 기술이지만 최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양파는 중심에서 단면이 원형으로 켜를 이루는 채소이기 때문이다. 수직으로 반 가른 뒤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썰면 두께는 일정하지만 높이에 따라 크기 혹은 부피는 조각마다 차이가 나니 고르게 조리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요령으로 가볍게 주먹 쥔 왼손을 양파에 얹고 맨 바깥쪽에서 중심부로 방사형으로 칼을 넣어 썬다.
달궈진 팬에서 45분간 볶아야 팬이 달궈지고 설탕이 녹으면 양파를 써는 대로 올린다. 격렬한 소리를 내면서 양파가 춤을 추기 보다 조용히 자리만 잡는다면 적절히 달궈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스테인리스 팬을 써야만 할까. 가정에서 팬을 단 한 점만 쓴다면 논스틱(Nonstick) 팬이 정답이다. 특히 계란을 편하게 익힐 수 있지만 이름처럼 식재료가 붙지 않는 코팅이 되어 있으므로 스테인리스 팬에 비하면 양파의 캐러멜화가 원활하지도 않을뿐더러 정수이자 핵심인 눌어붙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기밥솥의 매끈한 내솥 코팅이 관리에는 편하지만 누룽지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누룽지와 구수한 숭늉의 원리도 같은 캐러멜화이기 때문이다.
정석대로라면 고른 조리를 위해 다 썰어 한꺼번에 팬에 올리는 게 맞겠지만 조리시간이 꽤 길기 때문에 시차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 더군다나 무게 대비 86%에 이르는 수분이 거의 다 빠져 버리므로 양도 엄청나게 줄어든다. 그러므로 일단 팬이 넘쳐나도록 수북하게 쌓아 종종 뒤적이며 볶는다. 양파는 조리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변하며 각기 다른 맛을 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색을 차별 없이 사랑한다. 쌈장이나 춘장에 찍어 먹는 생양파 본래의 흰색부터 센 불에 아삭함이 살아 있도록 살짝 볶아 내는 반투명한 흰색, 맛의 바탕을 이루느라 국물에 녹아든 투명함, 그리고 간장식촛물에 맛이 배어든, 까만 색의 바탕을 이루는 흰색까지 말이다. 그 사이 어디쯤에 캐러멜화된 양파가 띠는 아주 진한 갈색도 자리를 잡는다.
일단 수분이 빠지고 부피가 줄어 든 뒤 온도가 110℃를 넘으면 본격적인 양파의 캐러멜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조금씩 양파가 스테인리스 팬의 바닥에 붙기 시작할 테니 나무 주걱으로 긁어 낸다. 프랑스어로 ’퐁(fond)’이라고 일컫는 맛의 핵심이자 바탕이다. 종종 코냑이나 럼을 조금씩 부으면 훨씬 더 쉽게 긁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알코올이 날아가면서 리큐르 특유의 향도 배어든다. 물론 술이 내키지 않는다면 물을 붓고 긁어내도 좋다. 팬을 가득 메웠던 흰 양파가 검정색에 가까운 갈색의 한 줌이 될 때까지, 적어도 45분은 걸린다. 그만큼 불 앞에서 뒤적일 인내심이 없다면 베이킹 소다 약간으로 산도를 높여 양파의 세포막 파괴를 촉진시키는 꼼수를 쓸 수도 있다. 캐러멜화의 시간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기는 하지만 맛은 좀 아쉬울 수 있으니 적어도 한번쯤은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 볼 것을 권한다.
캐러멜화한 양파 활용법 그렇게 양파의 폭발하는 단맛에 눈을 떴다. 설탕 대신 생양파를 갈아 불고기를 재우면서 깃들었으면 소망했던 자연스럽고도 강한 단맛이다. 불을 만나지 않는 한 잠재력을 끌어낼 수 없으니 애초에 생양파에게 지우기에는 무거운 짐인 단맛이다. 캐러멀화한 양파는 한식에도 잘 어울린다. 특히 김치찌개 혹은 찜과 천생연분이다. 두툼한 냄비에 식용유를 살짝 두르고 돼지고기를 튀기듯 지진다. 녹아 배어 나온 기름에 김치와 국물을 넣고 적당히 볶다가 물을 부어 약한 불에 은근히 푹 끓이는 사이에 밥을 새로 짓는다. 금방 지어낸 밥 한 숟가락 위에 푹 익은 김치와 돼지고기, 그리고 캐러멜화한 양파를 조금 올려 먹는다. 요즘 유행인 ‘단짠’의 ‘밀당’은 물론, 매운맛의 허리를 가르며 파고드는 단맛이 입안 구석구석을 메운다. ‘이것이 한식이 꿈꿔야 할 이상적인 맛의 폭발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양식이라면 고전인 프렌치 어니언 수프가 있다. 몇몇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양파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면 나머지는 쉽다. 캐러멜화한 양파에 무엇이든 육수를 붓고 한소끔 끓이는 정도 만으로 수프 자체는 완성이다. 대부분의 수프에는 닭 육수를 바탕으로 만드는데 프렌치 어니언 수프만큼은 쇠고기 육수를 쓰는 게 정석이라고들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고 캐러멜화된 양파의 맛에는 쇠고기 육수가 확실히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진짜 쟁점은 육수의 선택이 아니다.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 바쁜, 전쟁 같은 현실 속에서 대체 언제 고기나 뼈 등을 사서 육수를 우려내겠는가. 이만큼의 공을 들여 양파의 맛을 농축시킨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체로 우리의 현실은 ‘직접 내린 소와 닭 육수의 선택’이라기 보다 ‘양파 수프를 끓여 먹을 수 있다’ 와 ‘그럴 수 없다’ 사이의 갈등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추워진 날씨에 어떤 선택이 현명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보인다. 소든 닭이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육수가 되는 농축 큐브라도 써서 끓이는 게 낫다.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두 가지의 핵심 재료로 마무리하는 게 전통이다. 일단 빵을 한두 쪽 담근다. 수프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수파(suppa)’에서 프랑스어 ‘수프(soupe 혹은 sop, 국물에 담근 빵 조각)’을 거쳐 중세에 영어로 정착했다.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가즈파초, 스페인 마늘 수프(소파 드 아요)와 함께 어원에 가장 충실한 음식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한식, 특히 등갈비나 곱창의 ‘절친’이 되어버린 모차렐라 치즈를 솔솔 뿌려 국물의 열기에 적당히 녹이면 완성이다. 치즈 또한 프랑스의 콩테, 아니면 스위스의 그뤼에르처럼 잘 녹으면서도 감칠맛과 짠맛이 좀 더 강한 것들이 제짝이지만 없어서 수프를 못 먹는 것보다는 모차렐라 치즈라도 쓰는 편이 낫다. 요즘은 개별 포장된 제품이 있으니 수프 1인분에 한 봉지씩 넣어주기 딱 좋다. 맛은 약할 수 있지만 적어도 쭉쭉 잘 늘어나니 먹는 재미는 있다. 허브의 향을 불어 넣고 싶다면 타임이나 로즈마리를 함께 넣고 끓인다.
완성된 수프는 잠깐 식혔다가 먹는다. 우리는 국물 음식을 지나치게 뜨겁게 먹는 경향이 있다. 그릇에 담아 5분 정도 두어도 따뜻함이 생각만큼 많이 가시지 않는 반면 훨씬 더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빵이 머금은 국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입천장이나 혀를 델 수 있으니 한결 더 조심한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몇 차례 후후 숨결을 불어 넣어 식히는 것도 좋다. 그럼 왠지 그 숨결만큼은 겨울이 따뜻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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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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