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분다. 상쾌하면서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 쓸쓸하여 그리움을 자아낸다. 웬일인지 우리 집 앞 ‘파라다이스 새’ 꽃들 사이에 있는 우편함이 기울어져 있어 가까이 가보니 우편함 나무기둥이 썩어서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야 될 것 같아 이웃집들 우편함은 어떻게 생겼는지 둘러보았다.
우리 동네 집들은 획일적으로 생긴 집들이 없어 우편함도 전부 제각각이다. 무쇠로 상자처럼 된 고전풍, 스테인리스로 된 타원형에 매끄럽게 생긴 현대식, 집의 입구에 돌을 잘 입혀 기둥처럼 된 우편함 건축물도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새 집처럼, 혹은 바둑이 모양의 우편함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생각을 곰곰이 하다가 ‘파라다이스 새’ 꽃들이 이쁜데, 그 앞에 너무 거창한 우편함을 만든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지금의 간단하고 소박한 우편함에 나무 받침대를 대어 자연 친화적으로 쓰기로 했다.
삼면에 날씬한 받침 나무를 대고 나사못으로 박으니 당분간 쓰기에는 충분하고 꽃과도 잘 어울려 좋았다. 세 개의 받침대를 대면서 나는 그 받침대가 다른 사람들과 편지로 연결 시켜주는 기다림, 희망, 사랑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요즘 편지의 대부분이 사무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은 극히 드물어졌지만 편지통을 보니 편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어릴 적에는 편지를 곧잘 썼었다. 학교 시간에 국군 장병아저씨께도 정성껏, 또 유행했던 펜팔에게도 편지를 쓰곤 했었다.
가정상황 때문에 어머님과 나는 한국에 떨어져있던 때 미국에 계시던 아버님께 빨리 다시 상봉하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편지로 자주 드렸었다.
아내보다 먼저 미국에 온 후로는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썼었다. 미국에서 자리 잡는데 걸렸던 짧지 않은 기간에는 빨리 다시 보고 싶다는 아내의 편지와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가 나에게는 상당한 기쁨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마음속으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경우도 있다. 편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우물쭈물 하며 오해에 대한 사과 편지를 못 띄운 친구들과 친척들에게는 쑥스러워 하다가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찬찬히 속에 있는 마음, 사과와 위로의 말을 왜 전달하지 못했던가?
생각나는 편지들도 있다. 지난번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아내와 내가 강의와 의료봉사를 하고 온 후에 그 곳 학장님이 보낸 편지였다.
“교직원들과 나는 두 분을 학교에서 뵐 수 있어서 영광스러웠습니다. 사랑으로 먼 거리를 와주시고 교실에서 단순한 일방적인 지식 전달의 수업시간이 아닌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함께 배우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너무 재미있었다고들 합니다. 사려 깊은 격려, 친절한 말, 부족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인내심은 우리에게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배, 축복입니다.”
그분의 편지는 우리 부부의 피곤과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지난달 딸의 결혼식 전날에 딸은 나와 아내에게 살며시 편지를 내밀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오늘 이런 날이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이날은 두 분에게서 지금까지 배운 진정한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나의 가정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기쁜 날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엄마, 아빠는 나에게 열심히 일한다는 것과 성실함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 주셨기에 그 모습은 일생을 통해 나의 삶속에 박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진정한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보여 주셨기에 결혼생활을 시작함에 조금도 두려움이 없고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가 자녀를 낳아 기를 때가 되면 두 분은 나를 안내하는 등불이 되실 것입니다. 내가 이곳까지 오게 해주신 것을 다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잘할 수 있게 도와주신 것, 나의 장래가 밝을 수 있도록 항상 아낌없이 도와주시고 가장 적절하게 물질로도 도와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한 엄마, 아빠의 딸. 희수”
다시 읽어보는 편지에 삶의 무게로 무거웠던 나의 어깨는 가을바람처럼 가벼워진다. 오늘 내가 감사하고 사과해야 할 분들에게 펜을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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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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