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원해. 하루 종일 귀에 꽂고 일하던 블루투스 이어피스를 빼니 공기도 잘 통하고, 치열했던 긴장이 풀어지며 비로소 마음이 푸근해진다.
밤 10시, 청소원들만이 사부작사부작 소리를 낼 뿐 사위는 적막하다. 오늘은 늘 하던 산책도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가 이제야 한숨 돌린다. 결말이 어찌 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수십 개의 자료를 스캔해 보기 좋게 이름을 다시 붙이고, 상대방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순서로 배열해서 폴더에 담아 전자결재로 보내는 키를 누르고는 몇 시간째 펴지 못해 뻐근한 다리로 기지개를 쭈욱 펴면서 나는 작은 행복감에 젖는다. 진인사 대천명.
잠시 숨을 고르며 서울의 친구가 보내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이라는 찬송 피아노 독주를 유튜브로 보고 있자니 마음에 평화가 물안개처럼 잔잔히 피어오른다. 마치 오늘 하루 아등바등 애쓴 나의 노고를 주님이 위로해시는 것 같은 은혜로운 느낌이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어쩌다 한번 서울에 가면, 나를 집으로 초대해 포도주를 곁들인 진수성찬으로 환영해주곤 하는 40년 지기 초등학교 친구가 보내준 것이다. 미국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그의 아들이 잠시 귀국해 교회에서 특주한 영상이라는데 어찌나 은혜롭고 아름다운지.
한참 바삐 움직이던 오전에 점심시간을 불과 30분을 남겨놓고 점심 번개신청 전화가 들어왔다. 이민 초기 북가주의 같은 한인은행에서 두개의 지점을 각각 맡아 함께 지점장으로 근무했던 인연이 있는 선배 L지점장이다. 곧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지금의 미국계 은행까지 근 40년 은행생활을 이어가며 은근과 끈기란 무엇인지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북가주 한인은행계의 산 역사라 할 만한 분이다.
얼마 전까지 LA로 내려가 4년간 근무하고는 이번에 다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으로 복귀하셨다는 거다. 바쁜 은행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명 해설가로 활약을 하는 모습으로 언제나 내게 큰 자극이 된다.
마침 산호세에 위치한 TV 방송국에서 녹화 촬영을 마치고 복귀하면서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란 말인가, 사전 약속도 없이?” 하며 괜히 살짝 투덜거리는 척 해보지만 나는 이내 총알같이 뛰어 나간다. 사전약속이 필요 없는 게 번개 아닌가. 그리고 무슨 죽고 살 큰일이 있다고 이런 좋은 일에 불평을 한단 말인가.
요즘 들어 인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들어, 귀한 분들과의 만남은 아무리 촉박한 전갈이라 해도,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최대한 응하려 애쓴다. 또 신세진 분들, 평소에 생각나는 분들은 너무 김빠진 타이밍이 되지 않도록 적절한 시일 내에 초대하거나 찾아뵙고 인정을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40대 초반에 이민와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세월은 꿈같이 훌쩍 흘렀다. 다시 한번 그 세월이 흐르면 나는 어느새 팔순을 바라보는 70대 후반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250마일 떨어진 북쪽의 은퇴촌인 파라다이스에서 발생한 역대 급의 산불 ‘캠프 파이어’로 근 60명이 소사하고 아직도 수백명이 실종상태인 가슴 아픈 한 주간이었다.
이웃의 불행 중에도 나는 업무로 바빴고 업무 외적으로는 작은 보람이 하나 있었다. 읽고 있던 젊은 변호사의 자서전, ‘힐빌리 엘레지’를 두 달만에 마친 것이다. 영어로 된 책이고 주말에나 겨우 시간을 내서 읽을 수밖에 없어 참 오래 걸렸다.
저자는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한 극소수의 성공한 힐빌리이다. 그는 불우했던 유년시절을 딛고 해병대와 예일 법대를 거쳐 유명 로펌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변호사로 변신해 미국사회의 엘리트 그룹에 편입되었다. 우연히 들른 고향에서 자기의 어릴 적 모습처럼 친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수양부모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10대 초반의 남자아이 브라이언을 보고 저자는 짙은 연민을 느낀다.
초판 1만부를 예상한 책이 의외로 200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큰돈이 생긴 저자는 가난, 해체된 가족, 이웃 간 불신으로 점철된 켄터키 고향에 조상들을 모실 작은 선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몰래 축하의 박수를 치게 되었다.
얼마 안남은 올 한해, 이번엔 어떤 책을 사서 읽어볼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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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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