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아래가 장수영 전 포항공대 총장.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9대 왕으로 391년에 왕위에 올라 412년까지 통치하였고 비려, 후연, 숙신, 동부여, 백제를 정벌하여 광대한 국토를 다스렸다.
20대 장수왕은 부왕의 훈적을 기록한 6.3 미터의 거대한 비석을 압록강 북쪽 국내성에 설치하였다. 비문은 4면에 1천802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현존하는 글자는 1천537자다. 비문은 세절로 나눌 수 있는데 제1절은 고구려 개국사적과 세계를 서술하였는데 시조는 추모왕, 제2대는 유류왕, 제3대는 대주류왕(대무신왕) 이라고 하였다.
제2절은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서술하였고 제3절은 수묘인과 입비 등 제도상의 문제를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 압록강 북쪽에 거대한 비석이 있는 것은 알았으나 중국 금나라 황제의 비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비문이 일본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83년 육군 참모본부의 사코오카게아키 중위가 쌍구가묵본을 가져온 후부터였다.
제1면은 33장 제2면은 28장, 제3면은 40장, 제4면은 32장 총133장의 종이에 옮겨 담았다. 비석은 이끼가 끼어서 읽기가 힘든 상태였는데 소똥을 발라서 말린 후에 불을 질러 탁본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 석회를 발라서 탁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탁본은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2면 5-8행에 있는 신묘년(391)년 기사인데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신묘년래도해파백잔( )( )( )라이위신민” 이라는 구절이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종래로 고구려에 조공하여 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 )( )( )라를 격파하여 저들의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학자들의 통설은 이 구절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이른바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는 왜가 아직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고 항해기술이 극히 낮아서 왜가 바다를 건너 신라와 백제를 정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에는 391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고 되어 있고 393년에는 백제가 남쪽 변방을 침범했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막았다. 394년에도 백제가 침범헸으므로 왕은 날랜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맞아 싸워 이를 패배시켰다. 8월에는 남쪽에 7성을 쌓아서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였다. 395년 8월에 왕은 백제와 패수 위에서 싸워 이를 크게 패배시키고 8천여명을 사로 잡았다.
비문에 의하면 396년에 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잔의 58개 성을 빼았으니 백잔의 임금이 남녀 생구 1천인과 세포 1천필을 내어서 바치고 왕에게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백잔은 벡제를 비하해서 부른 것으로 이해했고 이때의 백잔왕은 아신왕으로 생각했으나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이 항복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2년 후에는 아신왕이 8월에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북책에 이르렀다. 그날밤에 큰 별이 진중에 떨어져 소리가 났으므로 전쟁을 그첬다. 또한 58개의 성이름이 모두 생소하여 한반도에 있는 성이라고 볼 수 없다.
백잔은 백제가 아니고 규슈에 있던 삼국의 분국 구다라로서 신라, 가야의 분국도 거기에 있었고 왜가 신묘년에 왔다는 것은 왜가 삼국의 분국을 침략했던 것이다. 일본 서기에도 391년에 신라, 백제, 가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은 찾을 수 없다.
399년에 신라 사신이 태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국경에 가득하여 성지를 파괴하고 노객을 그백성으로 삼으니 왕에게 명을 청합니다” 라고 하므로 태왕은 400년에 기병과 보병 5만을 보내서 신라(시라기)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왜적을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잇달아 성을 함락하여 성들이 곧 항복, 귀순하였다. 지금까지 여기의 임나가라는 김해지방으로 이해했으나 실은 임나가라가 규슈에 있었다. 당시 신라왕은 내물왕이었는데 삼국사기에도 399년에 내물왕이 고구려에 청병했다는 기록은 없다.
404년에 왜가 불궤하여 대방의 경계에 침입했다는 기록도 지금까지는 대방이 황해도 지역으로 이해했으나 여기서는 규슈의 대사강 유역이었다. 결국 지금까지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전쟁은 모두 한반도에서 있었던 것으로 이해했으나 김인배, 김문배가 “임나신론 역설의 한일고대사”에서 광개토대왕이 396년과 400년에 규슈에 있던 백잔과 왜를 정복한 것임을 밝혀 놓았다.
김부식은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했던 기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391년부터 404년까지의 역사를 삼국사기에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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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영 전 포항공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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