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서울에 갔을 때 계획에 없던 뮤지엄 투어를 하게 되었다. 한두 군데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일정에 포함했는데 그게 하루하루 더해지면서 다섯 군데로 늘어나 마치 여행 목적이 미술관 순례처럼 돼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경험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제까지의 서울 방문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제일 처음 간 곳은 ‘한국가구박물관’이었다. 서울 시내와 남산이 한눈에 보이는 성북동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고 이태영 박사의 딸 정미숙씨가 평생을 바쳐 일군 한옥 박물관이다.
정 관장은 1960~70년대 근대화·도시화 바람이 불면서 한옥이 헐리고 양옥과 아파트가 지어질 때 여기저기 버려진 전통 목가구를 2,500여점이나 수집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우리 가구의 세련된 미감과 쓰임새, 생활방식과 주거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15년 동안 한옥을 한 채 두 채 붙여가며 공들여 건축했다.
건축에 쓰인 자재 역시 정관장이 오랫동안 수집한 것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한옥이 헐릴 때마다 달려가 모아들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해체할 때 나온 기둥과 기와를 포함해 곳간채는 명성황후의 사촌 오라버니가 살던 마포 집 곳간이 헐리기 전 가져온 것이고, 사대부채는 순정효황후가 살던 수유리 집을 옮겨온 것이란다. 그렇게 우리의 얼과 혼을 담은 한옥박물관에서 1시간에 걸친 투어를 마치고 나면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감사와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서울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강추하고 싶은 곳으로, 예약이 필요하고 한국어와 영어 투어가 있다.
그 다음 방문한 곳은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Museum SAN)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이곳은 돌, 물, 쇠, 유리, 나무가 직선과 곡선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건축물이 사계절을 품은 자연풍광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곳으로, 날씨마저 얼마나 좋았는지 그 날 그 공간의 아름다움이 지금껏 마음을 맴돌고 있다.
한솔그룹 이인희 고문이 설립한 뮤지엄 산에는 종이박물관, 백남준 홀, 청조갤러리, 판화공방 등이 있고, 캠퍼스 가장 안쪽에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 전시관이 따로 지어져있어서 특별한 경험을 가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드넓은 정원에 조성된 다다오의 설치작품 ‘조선팔도’였다. 신라고분 천마총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아홉 개의 대형 돌무덤이 기묘한 시공간적 체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한국 건축사에서 유명한 김수근의 ‘공간사옥’을 2014년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이 사들여 현대미술관으로 만든 ‘아라리오 뮤지엄’에도 갔었다. ‘공간’의 독특한 구조를 최대한 보존한 곳으로, 김 회장이 40년간 수집했다는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한남동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은 한국서 가장 유명한 사립미술관인 만큼 내용 면에서 확실히 풍요롭고 수준 높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특히 고미술 전시관인 제1 뮤지엄은 4개 층에 걸쳐 도자기부터 민화까지 전통미술품을 진열하고 있는데 국보급 유물이 즐비하다.
인사동 안쪽으로 계속 걸어가다가 만난 ‘고희동 가옥’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이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1918년부터 41년간 살며 수많은 작품을 남긴, 근대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곳이다. 좁은 복도를 따라 안채와 사랑채, 화실을 돌며 100년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한가지, 한국의 몇몇 미술관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아쉬움이 있다. 가이드 투어만이 허락되거나, 동선을 규제하고 관람순서를 정해놓는 ‘통제된 관람’이다. 예술작품이란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고 감상 속도도 다른데,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만 듣다보니 충분히 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본인이 원할 경우에만 가이드나 오디오 투어를 선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유롭게 관람하는 일이 당연해서 한국의 이런 문화는 좀 어리둥절하고 불편했다.
뮤지엄은 다른 나라 여행을 가면 당연히 돌아보면서 유독 내 나라에 갈 때만은 외면하는 곳이다. 수준이 열악할 거라는 선입견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뮤지엄들은 기획과 전시뿐 아니라 컬렉션 및 건축물 관리에서도 선진국 수준이다.
인기 예능프로 ‘알쓸신잡’에도 나오듯 한국은 방방곡곡이 박물관 천국인 나라다. 기회 있을 때마다 부지런히 다녀야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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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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