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상상으로도 연관 짓기 어려웠던 부조화가 조화를 이루었다. 남과 북의 정상은 천지를 배경으로 맞잡은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문 대통령은 파안대소하고, 김 위원장은 희색만면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을 주입받으며 자란 세대로서 문 대통령은, 그리고 한민족은 먼 길을 건너왔다. ‘적대’에 고정되었던 마음을 ‘화해’로 돌리니 새롭고 낯선 길들이 열리고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마음의 조화이다. 국가도, 개인도 다르지 않다.
화해와 적대의 사이, 긍정과 부정의 사이, 희망과 절망의 사이 … 마음의 위치가 삶을 결정한다. 삶은 세상과 내가 빚어내는 합작품, 앞에 펼쳐지는 상황과 그걸 대하는 나 사이의 조율로 삶의 내용은 결정된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절망감을 가장 절망적인 방식으로 터트린 사건이 매릴랜드에서 일어났다. 지난 17일 50대 후반의 한인가장이 ‘함께 죽자’며 아내와 삼남매 그리고 스스로에게 총을 쏘았다. 총탄 세례에 부부와 10살짜리 아들이 그날로 숨지고, 총상을 입었던 11살과 22살의 두 딸 중 동생이 사흘 후 숨졌다.
뉴스를 접한 한인들은 분노했다. “사랑하는 가족, 그것도 어린 자식들에게 총을 쏘는 사람은 제정신인가, 어떤 정신상태인가” -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죽은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특히 분개했다. “그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보며 어떻게 총을 쏠 수가 있을까!”
“크리스마스 때마다 배 한 상자를 선물하던 사람, 기꺼이 자동차를 거저 고쳐주던 사람, 한국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잔디를 깎던 사람” - 바로 옆집에서 18년을 함께 산 타인종 이웃은 김용문(57)씨를 그렇게 기억했다. “이런 일을 벌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이웃”이었다고 그는 지역 TV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밖에서 보기에 평범했던 가정이 언제부터인가 지옥이 되었다. 김 씨의 마음이 지옥이었다. 그는 홧김에 총을 쏜 게 아니라 일가족 동반죽음을 미리 계획했던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20대 초반 미국에 와서 자동차 바디 정비사로 일한 그는 삶이 순탄치 않았다. 초혼과 재혼이 2년, 3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고, 12년 전 결혼한 세 번째 부인과 남매를 낳으며 잘 사는 듯 했지만 생활고가 덮쳤다. 그가 실직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부 간 불화가 심했다고 한다.
절망감이 깊어지면서 그는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았던 것 같다. 심리적인 터널 시각 현상이 일어난 것 같다. 절망의 캄캄한 터널에 갇혀서 ‘죽자’는 외곬 생각 외에 다른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가장은 가족을 죽이는 괴물로 변했다.
매년 미국에서는 1,000~1,500건의 가족 살해-자살 사건이 발생한다. 가해자의 90%는 남성이다. 대부분 가장으로서의 권위/지배의식이 강한 이들로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동기는 보통 두 가지이다. 복수 혹은 애타주의. 배우자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때는 전자, 실직이나 파산 등으로 재정적 어려움이 클 때는 후자가 범행 동기가 된다. 김 씨 케이스는 애타주의. 가족에 대한 사랑, 비뚤어진 사랑이다.
“직장을 찾을 수 없으니 가장으로서 가족부양의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이렇게 비참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나 혼자 죽으면 가족들은 누가 돌보나. 혼자 죽는 건 무책임하다. 그러니 함께 죽어서 저승에서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게 가족들에게도 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라는 논리이다.
그가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절망감을 털어놓았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질식할 듯 캄캄한 터널에 바람 한줄기 불어들게 했다면, 참극이 예방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적대에서 화해로 건너가는 길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지옥 같은 고통의 원인인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정면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단순해진다. 성공이나 돈 같은 부차적인 것들은 제처지고 가장 중요한 관심사안만 남는다. 바로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말기환자 전문 의사인 아이라 바이오크 박사는 수많은 환자들의 마지막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라는 책을 썼다. 상처받은 마음들을 다독여주는 네 마디의 말이다. “나를 용서해줘” “너를 용서할게” “고마워” “사랑해” 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용서와 감사와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 산다면 삶은 살만할 것이다. 용서하니 사랑스럽고, 용서받으니 감사한 것이다. 국가와 개인이 다르지 않다. 일체유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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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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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참으로 안타깝다. 인생의 참 목적 예수님을 알면 구원의 길이 열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