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으로 보고 있다. 밈이라고 하는 문화적 정보 단위는 우리의 몸속에 기생체로 살면서 스스로 복제해가면서 번식해서 숙주를 죽게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문화, 이념, 종교의 정보단위를 말하는 밈은 유기체 속에서 유전자라는 단위가 복제되고 진화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된다. 밈이라는 말은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처음 도입한 말이다. 예를 들어 자살폭탄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지하드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의 ‘지상 낙원’같은 종교, 문화, 이념적 정보 단위 밈은 그 전파를 위하여 숙주의 목숨까지도 잃게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종족 번식을 위하여 자신을 퍼트리는 것처럼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일종의 문화적 밈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본’이라는 말은 ‘부’와는 다른 말로 생산에 투입되는 돈과 재화와 자본을 말한다. 자본은 투자를 전제로 하여 생산이 이루어진 후 돌아오는 이윤을 재투자 하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베스트 셀러 “사피엔스”에서 자본주의에는 경제적 교리를 넘어서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 핵심 신조는 “경제성장이 최고의 선”이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의와 자유, 심지어 행복까지도 경제성장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성장과 소비는 동전의 양면이다. “경제가 안 좋다”는 말은 “물건이 안 팔린다” 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무한소비’ ‘무한 경쟁’ 체제속의 ‘무한 성장’이 그 핵심이다. 이 체제는 소멸과 생산이 하나의 순환체제로 엮여서 지속적인 재생산을 창출해 내는 자연의 법칙과 달리 직선적인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가 수만년 동안 만들어 놓은 자연자원을 인류는 채취하여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는다. ‘생산 스테이션’에서 화학물질과 에너지를 투입하여 물건을 만들고 ‘유통 스테이션’에서는 지구의 곳곳으로 운송하고 ‘소비 스테이션’에서 소비자는 얼마간의 편리함을 위하여 소비한 후 막대한 포장재와 함께 버린다.
‘폐기 스테이션’까지 천연자원이 물건이 되어 소비자에게 오는 과정에서 투입된 유해물질과 화석연료의 연소에서 배출된 공해물질이 땅과 바다와 하늘을 오염시켜왔지만 더 큰 문제는 물건이 폐기된 후이다. 이미 위협받고 생태계 위기에 그 위협을 지속적으로 추가하는 것이다. 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는 엔진은 궁극적으로 소비자인 우리이다. 어쩌면 자본주의 밈은 우리가 배출하는 온난화 기체보다 더 큰 힘으로 자신의 숙주인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요인이 아닐까?
“우리는 안다. 땅이 사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을....갓난아이가 엄마의 심장 고동 소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한다.”. 1850년 피어슨 미국 대통령이 한 인디안 추장에게서 받은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당시 미국 정부에 의하여 땅을 팔라고 위협을 받으며 동족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다 못해 땅을 팔기로 결심하면서 보낸 스쿼미시 족의 시애틀 추장의 편지이다.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말은 전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땅과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나? 이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신선한 공기와 물방울이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사겠다는 건가?... 우리는 안다.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속을 흐르는 수액을,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이고 곰과 사슴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이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이 모두 한 가족이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이다” 라고 땅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설명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부탁을 한다. “그러니 우리가 땅을 팔거든 이 땅을 사람들이 찾아가서 꽃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음미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하라.”
시애틀 추장은 걱정스러운 경고도 잊지 않았다 “땅은 신에게 속해 있다. 땅을 헤치는 것은 창조주를 경멸하는 것이다. 당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들소가 몰살당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숲속의 신비한 구석이 사람 냄새로 가득하고... 귀뚜라미는 어디에 거할까? 독수리는 어디 사나?” “마지막 남은 빨간 사람(인디안)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억이 초원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그림자가 되고 있는 그때에도 그래도 해안과 숲은 여전히 여기 있을까?
우리는 거꾸로 이런 편지를 시애틀 주장에게 쓸 것 같다. “‘땅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우리가 땅에 속한다. 땅을 헤치는 것은 창조주를 경멸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라고. 우리속의 기생체 자본주의 밈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자신의 숙주를 죽이면서도 번식하고자 하는 이 기생체와 싸우지 않고는 우리가 살아남지 못 할 것 같다.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캐롤라이나 해변도시를 물바다로 만들고 지금껏 평화롭게 살아왔던 아름다운 소도시의 거주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대피소에서 고생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 말자. 나의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생활습관이 그들을 저 자연재해로 몰고 갔고 결국은 나도 그곳으로 몰고 가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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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기후변화 전문가 워싱턴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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