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왔다. 레닌그라드라고도 불렸던 러시아의 북서쪽, 네바 강 하구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자연 섬과 운하로 생긴 많은 섬들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황제),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수많은 운하와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데 1713년부터 1918년까지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였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있는 이곳에 표트르 1세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부동항 도시 계획을 세우고,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짓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돌을 모았다. 선박들은 들어올 때 10-30개의 돌을 가져와야 했으며,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고 가혹한 노동을 이기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 하였는데,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 버렸기 때문에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잘 계획된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궁전, 박물관과 광장으로 도시 전체는 제정 러시아의 웅장함과 사치함 자체였다. 겨울궁전에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 등 300만점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네바 강변에는 오로라 순양함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1904년 러일 전쟁에 참가한 순양함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함정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으로 유명하여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개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 신호탄을 계기로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렸다.
여행가이드 Y를 만났는데 그는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이민 4세였다. 그는 우리를 일명 ‘송진 성당’이라고 불리는 성당으로 안내를 하였다. 이 성당은 매우 건조한 토양에서 자라 송진이 풍부한 단단한 소나무가 사용되었으며 톱을 쓰지 않고 도끼로 다듬어져 건축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소나무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고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후 음악을 좋아하여 피아노를 치는 러시아 부인을 얻었다. 카자흐스탄에서 Y의 부모는 고려식당을 하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Y는 산에서 땔감을 구해와야만 했다. 비가 올 때도 불이 가장 잘 붙는 나무는 송진이 묻어 있는 소나무였기에 그는 송진을 머금은 소나무를 고마워했다.
소나무는 산소를 뿜어내며 독특한 향기를 내어준다. 땔감으로도 쓰였지만, 단단하게 자라서는 훌륭한 목재가 되어 집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소나무는 정말 아낌없이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상징이라 성당에 적합한 재목이었다. Y의 가정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잘살게 된 고려인이었으나 그렇지 못한 고려인들이 더 많았다.
조선말부터 일제치하에 살림이 어려웠던 한국인들은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하여 개척하며 살고 있었는데 러일 전쟁 후에 그 곳은 러시아 땅이 되었다. 연해주에 정착했던 약 20 만 명의 고려인들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는데 일본과 협력하여 소련에 반기를 들까 염려했던 때문이었다.
화물칸에 실려 40여일 만에 고려인들이 던져진 곳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 갈대숲이었다. 그곳에서 겨울을 나면서 수만 명이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근면한 고려인은 그 땅을 개척하고 농사를 지어 성공을 일구었다. 하지만 1991년 소련 연방의 붕괴로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러시아 언어를 금하고 각기 독립국가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면서, 고려인들은 이루어 놓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되었다.
살길이 막막해진 고려인들 중 다시 조상들이 살았던 연해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소련인도 아니고 중앙아시아인도 아닌 끊임없이 방황하는 고려인이 되었다. 잘 살게 해준다고 시작된 볼셰비키 혁명은 또 다른 힘 있는 자들을 만들었을 뿐 죄 없는 사람들을 다시 억압하고 있었다.
Y에게 노래 한곡을 부탁했더니 오로라 군함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대략 “오로라야 오로라야 너는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 너는 모두 잘 사는 날을 보게 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Y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은 수많은 고려인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소원은 혁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았다.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소나무와 같은 사랑, 몸소 보여주는 사랑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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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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