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비비안 웨스트우드 남성복 패션쇼. Nymag.com
영국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20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남성복 패션쇼에서 부랑자, 노숙자를 내용으로 한 옷을 선보였다. 모델들은 노숙자들이 살림을 가지고 다니는 마트용 쇼핑 카트를 끌거나 취침용 매트, 구호물품을 받는 노란색 비닐 봉지를 들고 너저분하게 보이는 커다란 털 외투를 걸치고 등장했다. 모델들의 창백한 화장은 이 패션쇼를 영감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노숙자의 모사(模寫)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를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 나름의 맥락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노동 문제, 노숙자 문제, 기후 변화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참여를 해왔다.
하지만 고급 옷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옷은 전시나 퍼포먼스를 위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팔기 위해 만들고, 사서 입는다. 게다가 비싼 고급 옷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 옷을 구입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한 걸까. 하이 패션으로 전이시킨 홈리스 룩이 멋지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나름대로 표현해 본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주변 사람을 좀 웃겨보고 싶었던 걸까.
사실 홈리스의 모습을 고급 패션으로 바꿔놓은 건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처음은 아니다. 크리스찬 라크르와는 가장 멋진 패션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고 존 갈리아노도 디올에 있을 때 신문지 같은 걸 둘러 입은 노숙자 패션을 선보인 적이 있다.
이는 또한 잠깐의 이슈로 끝난 게 아니라 패션 속으로 계속 파고 들었다. ‘신선한’ 룩을 찾는 건 언제나 패션 피플의 가장 큰 관심사고 최근 들어 하이 패션은 거리의 옷을 흡수하는 추세다. 예를 들어 한동안 유행했던 복잡하게 과장된 레이어드 룩이나 커다란 오버사이즈 외투는 분명 노숙자 룩과 연관이 있다. 타인의 가난을 과연 다양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노숙자 패션은 패션이 여러 모습을 가지는 데 기여를 했다.
옷을 입는 기존의 방식을 다 뛰어넘어 마구 걸치고 있는 모습이 착장의 기본 질서에 지배당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식으로 다른 사회나 집단의 문화적, 민족적,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들의 낯선 모습을 ‘새로움’이라는 이름으로 가져다 사용하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내용은 상관없이 겉 모습만 가져오는 거라 많은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낸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오래된 용어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최근만 봐도 올해 초 구찌의 패션쇼에서는 시크교의 상징인 터번이 등장해 논란이 있었다. 터번을 쓰고 나온 모델은 물론 시크족도, 시크교도도 아니었다.
당사자가 봤을 때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모습으로 타인의 처지나 고유 문화를 함부로 써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논쟁이 발생한다.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그에 따라 오해와 편견이 생긴다. 이해를 한다느니, 자기도 좋아한다느니 말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얄팍한 입장 표명일 뿐이다.
나름의 해법이라면 당사자가 직접 말을 꺼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리를 만들고 내줘야 한다. 다양한 성적 지향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주요 브랜드의 디렉터로 들어가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여성 디자이너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디올의 쇼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민자 출신 디자이너인 프라발 그룽이 “나는 이민자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선보이는 식이다.
그렇다면 오직 당사자들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표현의 자유가 너무 제한되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 밖의 타인이라면 우선은 듣고 보고 이해하는 게 먼저다. 그러기에 협업 같은 방법이 있다. 패션은 그런 혼합에 유리한 방식이다. 소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관심과 구매를 통해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리를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는 것일 테다.
물론 다른 문화라고 무조건 존중과 보존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세상엔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불평등이 있고 천대받고 박해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나 인간의 권리 확대와 균형 확보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변이들은 그 다음의 문제다.
2018년 구찌 패션쇼. 구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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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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