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과 9월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출장을 다녀왔었다. 키예프 중심가엔 서울의 광화문 광장처럼 독립광장이 있는데, 당시에 많은 이들이 모여 데모를 하고 있었다. 데모라고는 해도 화염병이나 폭력은 없이 큰 노랫소리와 구호만 이어졌다. 반러시아 친서방세력으로 ‘오렌지 혁명’을 이끌었던 빅토르 유센코와 ‘오렌지 공주’로 추앙받던 율리아 티모셴코가 권좌에서 밀려난 후, 친러 성향의 새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상황을 반대하는 집회였다. 군중들이 포스터를 높이 들고 구호를 외쳤는데,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던 내겐, 금발머리를 전통적인 농부처럼 땋아올린 단아한 미모의, 포스터 속 티모셴코의 얼굴이 인상 깊게 남았었다.
그때는 그저 한국이나 다른 제3세계 나라들에서 으레 보아왔던 양분된 세력과 그 지지자들 간의 다툼으로만 보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우크라이나를 잊고 지냈는데 최근에 트럼프 선거 캠프 참모였던 매나포트의 재판이 공개되면서 많은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매나포트는 친러파 야누코비치가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한 일등공신이다.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벨라루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사람으로, 그는 2004년 대통령선거전에서 부정선거 및 그의 당의 범죄와의 연관 등으로 2010년 선거의 당선 확률이 거의 없는 후보였다.
매나포트는 1980년대부터 전 세계 악명높은 독재자들의 자문 역을 맡아왔다. 아프리카 콩고의 32년간 참혹한 독재를 한 모부투 세세 세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앙골라의 반군지도자 조나스 사빔비 등등이 그의 고객이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좌에 앉은 이들의 뒤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해왔는데, 그렇게 매나포트는 야누코비치에게 초빙되어 2006년에서 2015년까지 그로부터 8백50억 원에 달하는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돈으로 뉴욕 맨하탄의 드레이크 호텔 Drake Hotel을 사려 했는데, 2011년 티모셴코가 뉴욕법원에 이는 국제적 돈세탁이라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감추어진 그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이 된 후 키예프 외곽에 인공호수, 골프장, 동물원 등을 갖춘 거대한 저택을 짓고 부정축재에 몰입한데다, 2013년 11월에 유럽연합 (NATO)과 인연을 끊고 러시아와의 경제의존을 천명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유로마이단 시민혁명으로 야누코비치를 추방한 후 유럽연합을 지지하는 세력이 다시 부상했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러시아는 한국인들에게 일본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언어를 뺏고 강제징용과 위안부와 같은 참상을 저지르고도 진정한 공식 사과는 커녕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처럼, 우크라이나인 말살 정책을 폈던 스탈린 정권과 구소련의 러시아인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키예프에서 성 미하일 성당을 둘러보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묵었던 호텔 바로 옆에, 햇살에 반짝이는 크고 작은 황금 돔이 인상적인 교회가 서 있었다. 12세기 초에 지어진 이 아름다운 성당의 수도원은 소련에 의해 철거되었고 9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아진 그 안의 문화재와 귀중품은 모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 교회 입구에 작은 조각에 새겨진 그들의 역사였다. 구소련하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여러 차례 기근을 겪었는데, 그중 1932-33년에 걸친 기근으로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였다. 250~35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홀로도모르”라 불리는 그 기근은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정책적으로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인의 이 아픈 기억에 대해 러시아는 사실이 아니거나 실제 기근으로인한 사망이 있었다 해도 자연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외면한다. 그런 러시아는 야누코비치가 축출된 후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자, 2014년 봄,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령 크리미아 반도를 점령했고 점령지를 더 넓히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매나포트의 재판 뉴스에선 그의 탈세와 부정축재 및 돈세탁을 범법행위로 언급하지만, 그나 그런 이를 고용해 정권을 잡고자 하는 이의 죄질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고도의 사기기술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흐리게 해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이들이 권력을 잡고, 혼돈된 사람들은 그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해질 때에야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혼돈 속에서 너무 늦기 전에 바른 판단을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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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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