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0대 초반이었던 시절 당시 40대였던 선배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선배 침대 옆 탁자에 화를 다스리는 법에 관한 책이 놓여 있었다. ‘남편분이 문제가 많나? 아이가 속을 썩이나?’ 궁금해하다가 “요즘 뭐 화나는 일 많으세요?”라고 직접 물었더니 선배는 “사는게 다 그렇지”라고 답했고 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40세가 되면 불혹이라하여 세상일에 갈팡질팡해서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없게 된다던데, 40대에도 자기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책을 보다니… 늘 평화로워 보이던 선배 삶도 그닥 행복하지 않은가보다’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기대한 40대는 그랬다. 예민하고 날카로워 모난 성격을 가졌던 사람이라도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 세상에 마모되어 둥글둥글해지고 부드러워지겠지. 무슨 일에도 현명하게 대처하고 지혜로운 결론을 낼 수 있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불혹을 넘어 40대 중반이 되고 보니 현실 속 나는 내가 기대했던 40대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나이를 먹으면서 살이 찐 덕분에 외모는 분명 부드러워졌다. 회사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언쟁을 하면서까지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도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노하우도 어느 정도 생겼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일 뿐 실제로 내 아량이 넓어지고 속마음이 둥글해졌다기보다는 내면의 모습을 숨기는 보호막만 두꺼워진 것 같다.
오히려 해가 거듭할수록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더 분명해지고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서는 더 큰 확신을 가지게 되다 보니 맘에 안 드는 상황, 해결되지 않는 문제, 불쾌한 사람 등을 접하게 되면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거부반응이 예전보다 더 크게 온다. 두툼해진 보호막 덕에 그 화를 잘 숨길 때도 많지만 가끔 보호막을 비집고 터져 나와 엉뚱하게 화가 폭발하면 그로 인해 나의 가장 소중한 관계에 금이 가기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까칠해지는 나를 보며 ‘불혹이 지나서도 나는 왜 이렇게 자꾸 화가 날까. 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자책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40대가 되면 모든 상황에 자애로워질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한건 완전한 나의 착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불혹을 얘기했던 공자님 정도로 도를 닦고 수련을 하면 모를까 그냥 평범한 나는 나이 50이 되고 60이 되어도 순간 욱하거나 화를 내는 내 자신을 계속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팩트를 받아들이니 마음도 편해졌다.
대신 나를 화나게 하는 상황이나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함으로서 내게 독이 되는 ‘화’의 생성을 줄이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서 가치관이 달라져 서로 안 맞는다면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회사 일에 집안일에 남편과 아이들까지 챙기려면 마음 잘 맞고 가치관 비슷한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릴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데 같이 있으면 불편하거나 불쾌해지는 사람들에게 굳이 내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 날 일이 줄면서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은 일로 엉뚱하게 화내는 일도 동시에 줄어드니 한번 맺은 인연은 무조건 길게 이어가야한다는 생각도 버리게 되었다.
나를 화나게 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도대체 왜 화가 나는 것인지 내 분노의 시작은 어디인지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시작이 마음 깊은 곳의 상처라면 그 상처를 치유하고 무언가에 대한 불만이라면 그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분노의 씨앗을 없애면 더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막상 화가 났을 때는 무조건 누르고 삭이며 화를 축적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바람직하게 화낼 수 있는지 고민도 필요하다. 언성을 높이거나 히스테리적으로 신경질을 부리지 않고서도 나의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억울하거나 답답한 마음을 표출해 정신적 건강은 유지하면서도 나의 화를 받아들이는 상대방과의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사는게 다 그렇지’라던 선배를 떠올리며 임상 심리학자 로버트 네이의 책 ‘쿨하게 화내기-Taking Charge of Anger, Second Edition: Six Steps to Asserting Yourself without Losing Control’를 주문했다. 다음 주 휴가 여행 틈틈이 읽을 예정인데, 여행 후에는 쿨하게 화내는 기술 덕에 마음에는 평화가 삶에는 긍정적 변화가 생기길 기대해 본다.
<
실비아 김 현대오토에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4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완전공감. 불혹이라는말은 옛날말인듯..가끔 말도안되는것으로 손님이따지는데 승질이확...
좋은글 잘앍었어요 한심한글많이 올리는데 간만에 좋내
한국어도 있나요?
말은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