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번 주말 어머니 뵈러 갈게요” 아들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좁은 방안을 뛸 듯이 왔다갔다 서성인다. 오래간만에 남편, 아들과 함께 베데스다에 있는 일식집에 가서 즐겁게 담소하며 좋아하는 스시 시켜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안에 군침이 돈다. 알츠하이머병 몇 년째 앓고 있는 남편 병간호에 지쳐 나 자신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와있는 상태인데 아들의 연락으로 활력소를 얻은 듯 기운이 솟아오른다.
미국 독립기념일이 끼어 있어서 주중인데 아들이 메릴랜드 엘리콧시티에 있는 자신의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이다. 뉴욕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매일 환자진료와 크고 작은 수술 등 꽉 찬 스케줄로 신경 곤두세우는 긴장의 연속인데 얼마나 피곤할까.
대학병원에서 줄곧 근무해 부교수까지 지내다 뉴욕에 있는 종합병원에 발탁돼 간지 6년째, 거기다 앞으로 5년간 연장근무가 확정된 상태에서 아이들 보겠다고 한 달에 두번 꼬박꼬박 그 멀고 험한 길을, 왕복 12~13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운전하며 오가곤 했다.
집으로 올 때는 어미에게 안부를 묻고, 뉴욕으로 돌아갈 때는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천성으로 타고난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며 다녔던 아들. 뉴욕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조차 밤길 운전을 꺼리는 위험한 길, 더욱 한겨울 눈이라도 펑펑 휘날려 쌓여 얼어붙기라도 하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지난해 7월 초, 피로에 쌓인 아들 얼굴을 보며 환희에 가득 차서 꿀맛 같은 식사를 즐긴 것이 아들과의 이 생에서 최후의 만찬이 될 줄이야. 이 날이 이 세상 하직인사 하려고 다녀간 것처럼 돼 버렸다.
7월 첫 목요일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7월5일 밤 자정 무렵, 교통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순간 눈앞의 온 세상이 재색으로 변해 버리고 심장박동도 멎은 듯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동작도 할 수가 없다. 시간조차 멎어 버렸다. 사고소식을 듣고도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어미의 마음.
병을 앓고 있는 남편, 말기에 들어서는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입원시켜 놓고 가야하나, 급격한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할텐데 생각할 여유조차 없어 그냥 뉴욕 아들 사고 현장으로 떠나기로 했는데, 남편은 소풍가듯 순순히 따라 나선다.
딸과 내가 울며 가다가 지쳐 문득 밖을 보니 포코노 마운틴이라는 하얀 글씨가 커다랗게 녹색 수림 속에 떠 있다. 이 길은 남편이 병나기 전까지 한해도 빠짐없이 일 년에 두 번 여행을 다녔던 곳이다. 아비, 어미가 즐겨 다녔던 그 길을 아들이 많은 피로를 안고 왕복했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갈기갈기 찢어진다.
살아생전 자기희생을 망설임 없이 실천해 오던 의인 기질이 강했던 아들.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슬픔의 심연으로 떨어지면서 떠오른 생각은 아들이 은퇴 후 어미와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일’이었다. 아들은 의학 관련 책을, 나는 문학 에세이를 써서 함께 책을 내기로 했던 약속이다.
동시에 아들이 남기고 간 보물 항아리. 티 하나 없이 영롱하고 색조 또한 그 성격처럼 투명하다. 그 항아리 속은 얼마나 깊고 넓은지 평소 어미 가슴 속에 꽁꽁 숨어 있다가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라든가 동녘 하늘이 하얗게 밝아오며 먼동이 트면서 항아리의 뚜껑은 소리 없이 열리고 쏟아져 나오는 눈물.
아들은 인생의 정상 황금기에 드라마 장면보다 더 기묘하게 최후 장면을 연출하듯 흔적도 없이 산화해 갔다.
아들은 대형 밀크 탱커 트럭과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날 아들 외에도 앰뷸런스 차량에 타고 있던 미국인 3명도 함께 희생됐다. 그 동네 지리에 밝은 38살의 사고 운전자의 한순간 부주의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4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가족들을 슬픔의 늪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뉴욕에 도착해서 먼저 아들의 사고 난 차를 견인해 간 정크 야드로 달려갔다. 차체는 앞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차체를 절단하고 아들의 시신을 꺼냈다고 한다. 차체의 모든 유리창은 산산조각 나고 아들이 흘린 선혈은 사방팔방으로 튀어 석양 빛에 저항하듯 슬픈 빛을 나에게 보낸다. 아들의 압축된 차 주위를 몇바퀴 계속 돌다가 문득 운전석을 보니 얌전히 개켜져 있는 아들의 평상복 위에 장거리 운전할 때 끼고 다녔던 알 빠진 선글래스가 나의 발길을 붙들고 놔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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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전 수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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