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텍사스 여행 중 포트워스 근대미술관에 들렀다가 특별전시 중인 극사실주의 작가 론 뮤익의 조각품들을 보았다. 작품들 속 모공, 주름, 털, 손톱, 눈동자, 지문 등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파라솔 밑에서 여유를 즐기는 노인커플을 과장되게 큰 사이즈로 표현한 ‘Couple Under an Umbrella’라는 작품은 인물들의 시선과 표정 그리고 혈관이나 검버섯까지 표현한 피부 질감 등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가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관적인 감정을 극도로 배제하고 일상적인 현실을 기계적으로 확대해서 충격 효과를 유발한다는 극사실주의 혹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목표는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리얼한 묘사도 결국은 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란다. 극도로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아이러니가 극사실주의라니,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한 사람들이 매우 비현실적인 크기로 표현된 작품을 직면했을 때 느꼈던 나의 복잡한 감정이 설명되는 듯 했다.
문득 극사실주의 작품처럼 우리도 주관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면 무엇이 사실(real)이고 무엇이 허구(false)인지 너무나 헷갈리는 이 세상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사실과 허구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어릴 적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감정을 거의 못 느끼고 오직 이성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검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한국드라마를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현실은 좀 달라 보인다.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와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빈번히 사용되더니 옥스포드 사전에 의해 2016년의 단어로까지 선정된 ‘탈-진실 (post-truth)’의 의미를 보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실이나 진실을 알아내려는 노력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믿음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주관적 느낌대로 판단해서 분노나 증오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진실을 보려는 것에 비해 훨씬 쉽다. 그러니 굳이 힘들게 진실을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외면 받는 진실 대신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들을 생산해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을 악용하는 세력들이 많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회사나 조직에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 자기감정을 표현하는데 인색해 보이는데 어떻게 감정이 진실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일까.
솔직히 감정을 드러내면 미성숙한 사람으로 분류되고 부정적인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것이 프로페셔널하다고 여겨지기에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데 익숙하다. 동료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도 위로의 말을 전할 뿐 내 일처럼 같이 나서주지 못하고, 약속했던 시간에 일을 해주지 않는 협력부서에 대해서도 우선 일을 마무리해야 하기에 화를 내고 따지기 보다는 웃으며 좋게 부탁한다.
하지만 우리가 분출해내지 못한 증오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음속에 조금씩 쌓일 것이다. 그렇게 억눌렀던 감정들이 회사나 조직 밖에서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접했을 때 특히 미투 운동 관련 뉴스처럼 공분을 일으키기 충분한 정보들을 접했을 때 비정상적으로 과하게 표출되는 것이지 싶다. 진실 여부는 뒷전에 두고 말이다.
문제는 진실공방이 이어지는 경우, 카카오톡 대화 같은 조작된 증거들에 진실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감이 더해져 편을 가르고, 반대편을 감정적으로 비방하는 오류를 범할 때 심각해진다. 그로인해 누군가는 억울하게 상처 입을 수도 누군가는 죄가 있음에도 빠져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밝혀질 때까지 의심하고 거짓으로 밝혀질 때까지 믿을 수 있는 객관적 이성. 쉽지는 않겠지만 평소에 울분이 쌓이지 않게 조금씩 감정을 표출하고 운동이나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어서 감정을 건강하게 소모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응어리진 감정이 엉뚱한 곳에 비정상적으로 투영되어 진실을 외면하게 되는 대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노력했듯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정보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통해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허구도 식별하고 더 나아가 진실 그 너머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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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김 현대오토에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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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어가며 살다보니 손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이익이 더 많은걸 겪었습니다,